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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무대에서 찾은 살아있음의 감각” [D:인터뷰]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2.27 08:38
수정 2025.12.27 08:38

'라이프 오브 파이' 파이 역 박정민

8년만 공연 무대

2026년 3월 2일까지 GS아트센터

배우 박정민에게 연극 무대는 언제나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과 공포가 서린 곳이었다. 2017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그는 줄곧 무대 제안을 거절해 왔다. 관객들이 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찾아오는데, 스스로가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달랐다.


“사실 그동안 무대 복귀 제안이 올 때마다 잘할 자신이 없어서 죄송하게도 고사를 해왔습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죠. 하지만 우연히 유튜브로 해외 공연 영상을 보게 됐는데, 그 연출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멋있더라고요. 저 정도로 갖춰진 무대라면, 나라는 배우가 그 무대의 한 조각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는 이번 작품에 참여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오디션을 자원했다. 노래가 없는 정통 연극이기에 오직 연기력과 신체 표현만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점도 그를 움직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원작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에 매료되었습니다. ‘저 안에서라면 나도 무언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죠.”


오디션 현장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오디션에서 그는 대사를 읊는 것 이상의 경험을 했다. 특히 퍼핏티어들과 함께 몸을 맞대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휩싸였다.


“오디션 도중 퍼핏티어 배우 세 분이 저를 번갈아 가며 들어 올리고 지탱해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움직임 속에서 서로의 몸에 의지하는데, 저를 들어 올리는 그분들의 손길이 너무나 섬세하고 따뜻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보호받고 있구나, 이 무대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박정민은 이 눈물의 경험이 그를 파이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평소 연기를 하면서 좀처럼 울지 않는 편인 그에게도, 타인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오는 감동은 낯설고도 강력했다. “그분들이 파이라는 소년을 무대 위에서 얼마나 아끼고 지켜주려 하는지 손끝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믿음이 무대 공포증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줬죠.”


‘라이프 오브 파이’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표류하게 된 17세 소년의 생존기를 다룬다. 작품의 말미, 파이는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호랑이와 함께한 경이로운 모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 사이의 잔혹한 살육이다. 박정민은 이 지점에서 작품의 철학적 무게를 느꼈다.


“처음에는 저도 ‘찌든 30대’의 시선으로 대본을 봤습니다. 당연히 잔혹한 두 번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연습을 거듭하며 파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갈수록, ‘무엇이 사실인가’보다 ‘살기 위해 무엇을 믿기로 선택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파이가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그 끔찍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신앙이었다고 해석한다. “종교가 없는 저조차도 사람이 왜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파이에게 있어 호랑이는 생존의 동력이자, 자신을 투영한 대상이었던 셈이죠.”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정교한 퍼펫으로 구현된 호랑이 리처드 파커다. 박정민은 무대 위에서 이 호랑이와 쉴 새 없이 사투를 벌이고 교감한다. 흥미로운 점은 리처드 파커를 조종하는 팀이 세 팀(A, B, C팀)인데, 팀마다 호랑이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A팀 호랑이는 굉장히 섬세합니다. 반면 B팀은 아주 거칠고 투박하죠. C팀은 유독 감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처음에는 각 팀의 호흡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차이가 오히려 즐거움이 되더라고요. 오늘은 어떤 성격의 리처드 파커가 나를 위협하고, 또 나와 함께 견뎌줄지 기대하며 무대에 올라갑니다.”


그는 퍼핏티어들에 대한 존경심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 안에는 좁은 공간에서 허리를 굽힌 채 땀을 흘리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호랑이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그분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저를 진짜 파이로 만들어줍니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호흡을 맞출 때, 비로소 무대 위에 ‘진짜 삶’이 피어오르는 기분입니다.”


배우 박정민은 그간 자신의 연기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에 대해 묘한 부끄러움을 느껴왔다. 특히 리허설이나 연습 과정에서 ‘연기하는 척’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간지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번 연극은 그런 그를 변화시켰다.


“이번에는 연습실에서부터 부끄러움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베테랑인 무대 배우들이 열정을 다해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며, 저도 기꺼이 망가지고 부딪혔습니다. ‘나 마흔 다 돼가는데 17살 소년처럼 보일까?’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동료들이 ‘정민아, 아저씨 같다. 더 뛰어라’라며 냉정하게 잡아준 덕분에 파이의 순수함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박정민은 관객들이 공연장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뜨거운 토론 거리가 하나쯤 남기를 바란다. “어떤 이야기가 진실인지,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는 어떤 호랑이가 함께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매일 밤 무대 위에서 저만의 호랑이와 싸우며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이 마법 같은 두 시간의 여정이 여러분에게도 작은 위로와 힘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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