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도산 위기에 내몰리는 中 전기차 업체들
입력 2024.05.05 07:07
수정 2024.05.05 07:07
거액 보조금·광활한 시장 노려 전기차 업체 100여곳 난립
업체 수십 곳이 중국내 시장 수요보다 더 많은 차량 생산
내수 시장 포화에다 ‘출혈 경쟁’ 지속돼 채산성 날로 악화
중국내 손실 만회하기 위해 ‘헐값’ 앞세워 해외 공략 나서
중국 전기자동차 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중국 자동차 브랜드의 전기차 가격 '출혈 경쟁'이 3개월째 지속되면서 수익성이 악화한 중소 업체들의 줄폐업이 예상된다는 암울한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중국의 전기차 브랜드 수십 곳이 해마다 중국내 시장 수요보다 많은 차량을 생산하고 있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지난 28일 보도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자동차업계 분석업체 엑스오토(Xauto)는 지난해 말 기준 중국 국산 브랜드 가운데 52곳이 신에너지차(전기·수소·하이브리드차)를 생산하고 있고, 판매 중인 모델은 모두 187개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중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비야디(比亞迪·BYD)는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전기차·플러그인하이브리드·상용차 포함) 시장에서 전년보다 58.3% 증가한 288만 3000대를 판매해 1위를 차지했다(시장조사 업체 SNE 리서치 기준). 글로벌 점유율도 처음으로 20%대(20.5%)를 돌파했다. 2위는 테슬라(180만 9000대·12.9%), 3위는 폭스바겐(99만 3000대·7.1%)의 순이다. 2021년까지만 해도 61만 4000대 판매에 불과했던 비야디는 주력인 10만위안(약 1900만원) 안팎의 저가 모델을 앞세워 2022년 테슬라를 제친 뒤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중국이 전기차 부문에서 단숨에 글로벌 선두 자리에 오른 것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광활한 내수시장 덕분이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스콧 케네디 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은 2009년부터 2022년까지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포함하는 신에너지차 부문 보조금으로 1730억 달러(약 239조원)를 쏟아부었다.
중국 정부의 전기차 지원책으로는 보조금 외에도 시장 금리보다 낮은 대출과 함께 자동차 제조업체를 위한 철강·배터리 가격의 할인도 포함된다. 이에 따라 비야디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정부로부터 최소 34억 유로(약 5조원)의 직접 보조금을 받았다고 독일 킬 세계경제연구소가 지적했다.
비야디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지원은 2020년 2억 2000만 유로에서 2022년 21억 유로로 급증했다. 킬 연구소는 비야디뿐 아니라 중국의 모든 전기차 상장 기업이 2022년 직접 지원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정부의 산업 지원은 EU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보다 최소 3~4배 많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막대한 보조금을 노린 중국의 전기차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경영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AlixPartners)의 스티븐 다이어 이사는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123개 브랜드가 한 대 이상의 전기차를 판매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비야디와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 중국 광저우(廣州)자동차그룹 산하 아이온(Aion), 상하이(上海)GM울링 등 단 4개 브랜드만 차량 40만대 이상을 판매했다고 설명했다. 40만대는 테슬라의 재무정보 기준 전기차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 지점이다. 대다수 업체가 보조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셈이다.
생산 물량이 중국 내에서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중국 정부는 한번 파산했던 기업까지 되살릴 정도로 업체들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글로벌 전기차 패권 강화를 위해 경쟁력이 낮은 업체에까지도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자동차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첨단산업 중심의 '새로운 질적 생산력'(新質生産力)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 전기차의 60%가 팔리고 있을 정도로 글로벌 최대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덕에 중국 소비자들의 자국 기업 밀어주기도 두드러진다. 지난해 비야디의 전체 전기차 판매량 중 96%는 내수판매가 차지했고 2022년에는 내수판매 비중이 무려 99%에 이른다.
사실 중국은 현재 자국 내에서 판매되는 자동차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상하이 컨설팅 업체 오토모빌리티와 중국 자동차업계 단체인 승용차시장정보연석회(CPCA)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연간 생산능력이 4000만대에 이른다.
하지만 자국 내에서 판매되는 자동차는 2200만 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은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물론 중국내 경쟁업체들 사이에 혹독할 정도의 중국 내 가격인하 전쟁으로 밀어넣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의 과잉 생산 물량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내수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상식을 파괴하는 수준의 저가 모델을 내놓으며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 3월 말에는 중국 대표적인 가전업체 샤오미(小米)가 최대 800㎞의 주행거리를 지닌 전기차 ‘SU7’을 21만 5900 위안에 출시해 전기차 가격 경쟁에 또 한번 불을 댕겼다. 이 때문에 실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치면서 중국 내 전기차 시장에서 '제 살 깎아 먹기식' 가격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야디는 앞서 지난 2월 자사 제품 가격을 5~20% 끌어내리면서 가격 경쟁에 불을 붙였다. 이후 지난 3개월 간 전기차 모델 50개의 판매가가 평균 10% 떨어졌다. 10만 위안 이하 모델이 24개이고 판매량이 가장 많은 15만∼20만 위안 모델이 37개였으며 35만 위안 이상 모델도 17개로 집계됐다. 가격 경쟁을 주도하고 있는 루톈(路天) 비야디 판매사업부 대표는 25일 SCMP에 “전기차가 휘발유차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며 “중국 소비자들을 위해 최고의 제품, 최고의 가격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 골드만삭스는 23일 보고서를 통해 비야디가 차량 가격을 평균 7%, 대당 1만위안 정도를 더 낮추면 올해 중국 자동차업계 수익성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SCMP는 “현재 비야디와 프리미엄 브랜드 리샹(理想) 등 전기차 제조사 몇 곳만이 수익을 내고 대부분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며 업체들이 수익성보다 시장점유율을 우선시함으로써 대규모 손실과 중소업체의 줄폐업을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덤핑 판매’에 힘입은 비야디 등의 약진에 밀린 미국 테슬라가 중국 등 각국 시장 판매가를 잇따라 낮추며 안 그래도 격화한 중국 내 출혈 경쟁을 부채질했다. 21일에는 중국에서도 모든 모델 판매 가격을 1만 4000위안씩 인하했다. 주력 제품인 모델Y는 중국에서 24만 9900위안으로 할인돼 5년여 만에 가장 저렴해졌다.
이에 중국에서 테슬라에 가장 근접한 라이벌로 평가받는 리샹은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L7' 시작가를 30만 1800위안으로 끌어내리는 등 전체 라인업의 가격을 6∼7% 인하했다. 비야디도 인기 차종들의 가격을 내려 '시걸' 해치백의 경우 1만 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특히 아직 여력이 있는 비야디 등이 추가 가격 인하에 나설 경우 중소 업체 수십 곳이 지속 한계선에 몰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다급해진’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자국 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가격을 무기로 해외시장 공략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SUV브랜드 제투(捷途)의 국제비즈니스 책임자 재키 천은 "떨어지는 국내 수익성의 완충재는 해외 확장"이라며 "중국 본토 전기차 제조업체의 가격 경쟁이 자동차 판매가 증가 중인 해외 시장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흐름이 이어지며 중국의 자동차 수출은 불과 3년 만에 거의 5배로 증가해 지난해에 500만대에 이르렀다. 지난해 수출의 4분의 3은 내연기관차로 상당수가 러시아로 향했지만, 해외 수출 전기차도 급증하는 추세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