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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광우병 투쟁 회고와 후쿠시마 오염수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3.07.04 05:05 수정 2023.07.04 05:05

운동권, 선거 승복의 전통 없다

한미FTA, 국가 주권 사실상 식민지 전락 오류

반이명박이 먼저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후행

민주당의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은 대선 불복 문제

ⓒ데일리안 DB

필자가 지난 6월 28일 조선일보와 했던 인터뷰가 1면에 실렸다. 덕분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격려 또는 비난하는 문자를 받았다. 인터뷰 내용이 길지 않았던 관계로 관련 내용을 보강해서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미FTA, 광우병 투쟁은 2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2006~2007년 노무현 정권하에서 한미FTA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투쟁이 1년 넘게 진행되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제기되었고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 위협이 있다고 보고 이를 반대하는 거리 투쟁이 2008년 5~8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를 보통 광우병 투쟁이라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미FTA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고 양자를 주도했던 단체가 사실상 같아서 양자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2006~07년 한미FTA 범국민운동본부의 정책팀장으로 활동했고 2008년에도 진보연대 정책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반대 투쟁에 중심에 있었다.


2006~07년 한미FTA 반대 투쟁을 압도했던 것은 반미였다. 한미FTA 반대 투쟁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주도했던 이해영 교수가 쓴 책의 제목은 ‘낯선 식민지, 한미FTA’이다. 책에 따르면 총칼이 오가는 전통적인 식민지는 아니지만, 국가 주권이 내용상으로 위협받는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당시 범국본에는 다양한 세력이 총망라되었는데 진보연대와 같은 주사파 운동조직 이외에 시민단체·지식인들이 대거 합류한 데는 그들 대부분이 ‘낯선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각종 성명과 보고서를 쓰고 다양한 토론회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미FTA 협상을 제국주의-식민지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주사파였던 나는 오랜 시간을 거쳐 19년 최종적으로 전향했는데 그 오랜 기간의 변화 중 이 무렵이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중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일본 전자회사 전체의 영업이익보다 많다는 자료를 읽었던 기억은 지금도 선하다.


한국이 ‘낯선 식민지’로 간다고 생각했으니 호응이 있을 리 없었다. 2000년대 중반이면 한국이 통상대국으로 발전하면서 극적으로 비약할 때이다. 결과적으로 한미FTA를 추진했던 노무현 정권의 논리가 더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2006~07년 한미FTA 반대 투쟁은 그렇게 고립되었다.


당시 한미FTA 반대 투쟁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베네수엘라 차베스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와 쌍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혁명적 열정에 젖어 있었던 20대 청년들이 나이가 들어 2000년대 초반 새로운 각도에서 혁명적 미몽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어떤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의 출범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광우병 관련 시위가 본격화된 것은 5월 2일이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명박 탄핵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고라에서 진행된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4월 6일에 시작되어 5월 4일 100만명을 돌파했다.(https://www.segye.com/newsView/20080504001294)


2006~07년 한미FTA 투쟁은 노무현 정권하에서 진행되었다. 덕분에 한미FTA 반대 투쟁은 농민 이외에는 대중적으로 지지받지 못했다. 반면 08년 광우병 투쟁은 이명박 정권하에서 진행되었다. 광우병 문제가 본격화된 4~5월 이전에 이미 반이명박 정서가 폭넓게 확산하여 있는 상태였다.


투쟁의 동력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대한 불만에 기초하여 반이명박 투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반이명박이 먼저 있고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후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2008년 투쟁을 광우병으로 정리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규정하고 그러한 규정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다양한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한반도 대운하, 4대강, 민영화 등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았다. 2008년 광우병 투쟁은 대통령 취임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명박 정권의 탄핵을 요구한 것이다.


그해 2008년 5~6월 나는 거리에서 살았다. 내 질문의 핵심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명박 정권의 탄핵이 가능 한가였다. 무리한 구호를 내걸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투로 반응했는데 그들 다수에게 이명박 퇴진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당연한 문제였다


돌이켜 보면 운동권에는 선거 승복의 전통이 없었다. 1987년 노태우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대부분은 부정선거와 5.18을 거론하며 노태우 후보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93년 김영삼 정권에 대해서도 상당히 그러했다. 문재인 정권이 추진했던 적폐 청산 또한 공존해야 할 정치적 상대방이라기보다는 친일파 잔재의 척결도 비슷한 성격이다.


우리는 2008년 투쟁을 광우병 시위로 기억하곤 한다. 시위를 형식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광우병 위협이 있는 쇠고기의 수입 문제였지만 내용상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것은 이명박 정권 탄핵 그리고 2007년 대선에 대한 불복이었다.


정리하자면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반이명박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을 부정하려는 내적 동기에서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도 그러하다. 반윤석열을 위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가 제기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반윤석열의 근본 원인도 이러저러하여서 윤석열에게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어도 그는 원래부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원천 부정론에 가깝다.


그래서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의 최종 결론은 오염수 방출 여부가 아니라 아마도 내년 총선에서 결론이 날 것 같다.

글/민경우 시민단체 대안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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