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의 짝은 위안스카이인데, 이재명의 짝은… [기자수첩-정치]
입력 2023.06.11 07:00
수정 2023.06.12 06:44
리훙장의 '부하의 부하' 위안스카이
조선의 '감국대신' 칭하며 국권농단
그 어렵던 시절에도 조선 사람들은
위안스카이 망발에 저항했었는데…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본래 청나라 서태후 때의 실권자였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부하의 부하'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임오군란이 터져 리훙장이 자신의 참모 우창칭(吳長慶)에게 병력을 붙여 조선으로 파병하자, '부하의 부하' 위안스카이도 함께 조선에 진주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유혈 진압한 우창칭은 이듬해 청불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자 철군했으나,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남겼다. 이 때부터 위안스카이는 '조선을 감독한다'는 뜻의 감국대신(監國大臣)을 망령되이 칭하며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좌우하려 했다.
청나라 북양대신의 일개 '부하의 부하'가 가마를 타고 임금만이 출입할 수 있는 중문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고종의 앞에서도 예를 표하지 않는 것은 물론, 고종이 청나라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이려 하면 "국왕을 폐하고 상국으로 압송하겠다" "이씨 가운데 사람을 뽑아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겠다"며 폐위와 정권교체 겁박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의 일개 국장급인 싱하이밍(邢海明) 중국대사가 우리 국민과 언론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국이 중국의 변화에 순응하면 중국 경제성장의 '보너스'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구슬리는 한편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패배를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며, 청나라 북양대신의 '부하의 부하' 위안스카이가 조선 임금의 진퇴까지 논하던 막장 상황을 떠올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농단하던 구한말은 비록 어지러운 시대였지만, 조선 백성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위안스카이 앞에서 생각 없이 굴종할 정도로 비굴하지는 않았다.
中 일개 국장급이 "보너스"로 꾀고
"베팅 후회한다"며 으름장 놓는데
고개 조아리고 두 손 모은채 환담하는
정치지도자의 모습 보게 될 줄이야…
주미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은 "신임장 전달에 앞서 상국(청나라) 공사를 먼저 찾아가 미리 상의하고, 대외 일정 때에는 항상 상국의 공사와 동행하되 뒤를 따르라"는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무시하고, 글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바로 만나 신임장을 전달했다. 격노한 '감국대신'이 고종을 협박해 박정양은 이듬해 소환당했지만, 그럼에도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후임 주미공사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청일전쟁으로 위안스카이가 쫓겨가자 다시는 청나라에 국권을 좌우당하는 일이 없도록, 중국 칙사를 조선 임금이 몸소 나아가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자는 논의가 일었다. 조선 백성들은 독립문 추진위원회의 모금 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는데, 위안스카이의 행패를 백성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위안스카이의 조선 국권 농단에는 심지어 청나라가 심어놓은 서양인마저 저항할 정도였다. 묄렌도르프는 리훙장이 조선에 보낸 외교 고문인데, 위안스카이의 행태에 분개해 고종의 뜻에 따라 러시아와 접촉해 청나라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조러 밀약을 추진하다가 들통나기도 했다.
구한말 그 어렵던 시절에도 백성들도, 박정양도, 심지어 서양인 고문도 위안스카이의 조선 국권 농단에 직면해 분개하고 저항했는데, 우리나라가 선진 7개국(G7)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이 시점에 중국 외교부의 일개 국장급 인사의 망발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며 의기투합하는 정치지도자가 나타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싱하이밍 대사의 망발은 과거 '감국대신' 위안스카이의 사례에서 그 짝을 찾을 수 있다지만, 면전에서 내정간섭성 발언을 듣고서도 불편한 기색 하나 표출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짝은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있었다지만, 이재명 대표는 실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