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포퓰리즘의 기원
입력 2023.03.09 05:05
수정 2023.03.09 05:05
‘개딸’, 정치를 적대적 계급 사이 관계로 봐
80년대 주사파, 선거를 가장 혐오하는 분파
90년대 중반 거리 시위 참여 40대의 동질성
40대,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자체를 유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 정국을 가늠하는 핵심적인 징표 중 하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급진 당원들의 움직임이다. 우리는 그들을 ‘개딸’과 같은 경멸적인 언어로 지칭하지만 ‘개딸’이 가진 정서는 비단 거리 시위를 하고 좌표 찍기를 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호남과 40대 그리고 민주화 시대를 거쳐온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내장된 어떤 특징이다.
6월 민주항쟁을 학생·청년들은 독특한 민주주의관을 발전시킨다. 보통 서구의 민주주의 이론은 영미형과 독일·프랑스 등의 대륙형 나아가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민주주의로 나눌 수 있다. 영미형은 선거를 통해 집권 세력이 결정되면 정치 그룹 사이의 대화와 타협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요소는 다분히 이와 별도의 공간에서 결정된다. 반면 마르크스는 정치를 적대적인 계급 사이의 관계로 보고 프롤레타리아가 배타적인 정치 행위를 통해 정권을 잡고 권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0년대 중후반 한국의 학생운동은 마르크스를 시원으로 하는 대륙형·사회주의형 민주주의관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선거보다는 4.19와 같은 대중 항쟁을 중시했고 선거에서 이해관계가 다른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에 대한 승복의 전통이 약했다.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학생운동은 87년 진행될 대통령 선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애써 선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고 강변하곤 했다. 87년 봄 직선제를 둘러싼 거리 시위가 벌어졌을 때 학생운동 분파 중 주사파 그룹이 선거 투쟁에 합류하여 세를 확보했다. 아이러니했던 것은 주사파야말로 선거를 가장 혐오하는 분파였고 그들이 선거 투쟁에 참여한 것은 지극히 전술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덕분에 87년 노태우, 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을 때 주사파는 결정적인 기로에 봉착했다. 주사파는 노태우 후보가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지만, 그가 군부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타도할 것을 주장했고 93년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90년대 중후반 한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사회를 완전히 장악한 주사파는 김영삼 타도를 위한 거리 시위를 진행했다. 88년과 95년 전두환노태우 구속 투쟁, 91년 강경대 투쟁, 96~7년 각각 연대 사태와 한총련 출범식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잊혔지만 90년대의 거리 시위는 6월 민주항쟁보다 규모가 크고 조직적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남겼다. 한국 사회에서 40대가 독특한 의식 지형을 갖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2002년 두 여중생 시위를 시작으로 2004년 노무현 탄핵, 2008년 광우병 촛불, 2009년 노무현 사망, 2014년 세월호, 2016년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시위가 한국 사회를 압도했다.
90년대 중반 거리 시위에 참여했던 한국의 40대는 2000년대 전 기간 벌어진 거대한 도심지 시위에서 90년대와 유사한 묘한 동질성을 발견했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성장했던 민초가 압도적인 다수 대중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로 잡는다는 서사, 그리고 선거와 같은 정치 행위를 넘어 거리에서 확인되는 집단적 해방감·동질감 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80년대 중후반 마르크스주의와 주사파 운동을 2000년대 분위기에 맞게 교묘히 수정하기 시작한다.
전대협 진군가를 작곡한 윤민석이 있다. 이 사람은 2000년대 초반 ‘fucking USA’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작곡한 바로 그 사람이다. 윤민석은 89년 전대협 진군가에서 학생들이 학업을 팽개치고 거리에 나선 이유를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라고 설명한다. 식민지 조국에서 선거란 무의미한 것이고 선거를 통해 누군가가 집권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존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랬던 윤민석은 2000년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한다. 민주공화국이란 선거를 통해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에 승복하는 체제이다. 불과 10년 사이에 주사파 핵심 활동가는 자신의 논리를 한꺼번에 뒤집은 것이다. 윤민석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다.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고 노무현의 죽음에 분노했던 청년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2000년대 대중운동의 뿌리가 그러했기 때문에 2000년대 운동은 80년대 중후반 급진주의의 뿌리를 갖고 있다. 첫째. 세상을 적(敵)과 아(我)로 본다. 이때의 적은 정적이나 정파가 아니라 매국노·반역자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검찰을 검찰 공화국이라 부를 때의 진정한 의미가 그런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것은 정권교체라기보다는 민주 진보파가 잠시 권력을 잃은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되찾은 때로부터 진정한 역사의 시간이 흐른다.
둘째. 선거를 통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정적이다.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거리 시위가 있었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소수일지언정 이재명 후보를 찍었던 절대다수의 생각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자체를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0대 청년 시절 그들 모두가 가졌던 질문과 동일한 것이다. 노태우·김영삼이 선거를 통해 들어섰지만, 독재정권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 또는 타도해야 한다. 노태우·김영삼에 윤석열 대입해도 될 만큼 80~90년대의 청년들은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도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체포동의안 부결 이후 민주당의 내홍이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민주당의 분란이 전통 정치 문법에 따라 해결될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현재 이재명을 지지하는 민주당 강경파는 선거로 들어선 대통령(노태우·김영삼)을 부인하고 거리를 누볐던 청년들이고 2000년대에는 민족해방운동의 거리 항쟁을 교묘히 촛불로 바꿔 문재인 정권을 열었던 주역들이다. 비슷한 예를 찾는다면 1793~4년의 자코뱅당이거나 베네수엘라 차베스를 지지했던 민중운동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민주당 강경파는 아마도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개딸로 부르는 이들에 대해 조금 더 심각하게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글/ 민경우 시민단체 대안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