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1>] 진군이냐 퇴각이냐
입력 2022.06.08 15:31
수정 2022.06.08 15:31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1화 진군이냐 퇴각이냐
김석규는 임봉식의 아내 정수진을 대면하고 부끄러움에 치를 떨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적을 섬멸하는 애국행위도 중요하지만 우선 몰골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근사하게 나오는 것이지 스크린 밖에서는 술꾼이나 알코올중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석규는 교전 장소로 지목된 금산주꾸미까지만 함께 진군할 요량으로 정수진의 군용차량에 몸을 실었다.
“전투에 임하든지 집으로 퇴각하든지 마지막 결정은 적진 상황에 한번 맡겨보자.”
김석규가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중 임봉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막상 금산주꾸미에 들어서자 김석규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며 다짜고짜 안방으로 치고 들어갔다. 선제공격! 기선제압! 김석규의 고무대야처럼 붉은 얼굴에 염화시중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며 정수진은 문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녀는 김석규가 퇴각할 거라고 오판한 모양이었다. 정수진이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박미옥에게 제보 전화를 걸었다.
“사돈어른 때문에 못 온다는데?”
한참을 통화하던 정수진이 잔뜩 목소리를 낮춰 결론부터 알려주고 계속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붉은 양념으로 도배된 주꾸미는 불판 위에 오르고 임봉식은 전선에 나설 것인지 퇴각할 것인지 빨리 결정하라고 김석규를 종용했다. 김석규는 천생 군인인 자신이 비겁하게 적을 피해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골치가 아팠다. 또한 이기건 지건 포화와 포연으로 자욱한 전쟁이 끝나고 나면 박미옥에게 뭐라 변명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교전을 서두르자. 군인이 전쟁 중에 뒤를 보일 수는 없는 법.”
김석규는 옛 드라마 <전우>의 소대장 나시찬이 빙의한 듯 비장한 톤으로 전투태세에 돌입하여 주꾸미를 지원받는 소주군과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을 벌였다. 붉었던 안색이 거무칙칙해져서 도중에 혼절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던 김석규는 정작 교전에 임해서는 명량해전의 이순신 장군처럼 물러서지 않는 강단을 보여주었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면서 임봉식의 얼굴도 어느덧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올랐다. 김석규의 선도투쟁에 감동한 임봉식 역시 몸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 나섰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정수진이 대뜸 김석규에게 총을 달라고 요청했다. 간호장교 출신의 정수진은 오늘만큼은 운전병이어서 교전수칙 상 전투에 나설 수가 없었으나 주꾸미 추가 지원을 받아 화력이 한층 보강된 적들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임봉식이 너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김석규는, 부창부수구나 감탄하면서 교전수칙 위반이라는 강수를 두며 현장지휘관의 직권으로 정수진에게 전투명령을 하달했다. 현장지휘관은 별도의 임명 절차를 거치는 게 아니라 전쟁비용을 계산하거나 계산할 의향이 있는 자가 맡게 되어있었다. 김석규는 현재 총알이 다 떨어져서 계산할 능력은 되지 않으나 계산할 의향만은 누구보다 충만한 자였다.
“소주군은 아무래도 화력이 막강해서 여군이 상대하긴 힘드니까 우리에게 맡겨두고 수진 씨는 맥주군을 상대하세요.”
김석규의 명령에 정수진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중무장할 수 있는데 여군이라고 차별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정수진은 현장 지휘관인 김석규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정수진은 맥주군과 교전함에 있어 원샷이라는 속전속결 보다는 일명 베어먹기라는 확인사살 기법을 사용했다. 김석규는 그것이 바로 정수진을 백전백승의 여전사로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하며 다음에 군단장 표창이 내려오면 꼭 임봉식 부부를 추천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지원무기인 주꾸미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전투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김석규는 이대로 종전을 맞이하는 게 서운해서 임봉식에게 소주군 1개 소대만 더 투입해 달라고 입에다 손나팔을 만들어 긴급하게 무전을 날렸다. 마치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전쟁터에 홀로 고립되어 아군의 보급을 애타게 기다리는 패잔병처럼 애잔한 모습이었다.
교신상태가 안 좋은 건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임봉식은 거듭 딴전을 피워댔다. 그래도 김석규는 손나팔에 들릴락 말락 목소리를 실어 끈질기게 교신을 시도했다. 소주 일병, 소주 일병 오버. 다른 테이블의 연합군이 지켜보기에도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결국 연합군 보기 부끄러워 그런 건지 아니면 고래로 내려온 ‘지성이면 감천’ 식의 달콤한 열매였는지. 이윽고 임봉식이 아줌마를 불러 또박또박 교신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적의 보급로를 확보해주다 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미옥이 딸 지우를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나자 임봉식이 돌연 사이다로 주문을 변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동정범 혐의를 쓰지 않으려고 돌변한 임봉식의 배신은 참으로 놀랍고도 비난 받아 마땅했지만 김석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몸을 벌벌 떨기만 했다. 적의 보급로가 겨우 뚫리려는 판국에 공습이 감행되다니.
박미옥은 빨치산 같은 김석규의 붉은 얼굴을 보고는 당장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임봉식 부부 때문에 최대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박미옥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수진과 즐겁게, 아니 즐거운 척 사이다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눴다.
김석규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재빨리 반전시킬 전략을 모색해 보았다. 전황이 좋지 않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김석규가 누구던가. 역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결코 이대로 물러설 김석규가 아니었다. 무책임한 퇴각은 군인의 기본자세가 아니다!
김석규는 최대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려는 속셈에 넌지시 철지난 집들이를 끌어들였다.
“봉식아, 아직 우리 집에 안 왔었지? 구경이나 한번하고 가라.”
“그럴까, 그럼?”
임봉식이 반색하며 덥석 미끼를 물고 정수진을 돌아다보았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