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⑱] 동물원 옆 미술관이 필요한 이유 ‘달리와 감자탕’
입력 2021.11.15 14:17
수정 2021.11.15 14:17
“직장 다니는 사람들, 애 엄마들, 한 평짜리 ‘고시원살이’ 하는 젊은이들, 여기라도 와서 숨통 좀 트이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대통령이든 노숙자든 티켓 한 장이면 누구라도 들어와서 똑같이 머리 식힐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드라마 ‘달리와 감자탕’(연출 이정섭, 극본 손은혜·박세은)이 16회의 순항을 마쳤다.
위 얘기는 드라마가 다 끝난 뒤 에필로그에 나온 내레이션이다. 미술관이 멀리 한적한 외지가 아니라 도심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말로, 청송미술관 관장 김낙천의 철학이고 그를 연기한 배우 장광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드라마 방영 중에도 김낙천이 얘기한 바 있고, 김달리(박규영 분)와 ‘송큐’ 송사봉 큐레이터(우희진 분)의 입으로도 다시금 강조됐고, 뜻을 함께하게 된 진무학(김민재 분)과 여미리(황보라 분)가 미술관을 지키기 위해 힘을 보탠 바 있다.
너무나 공감 가는 대사다. 예를 들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로 좀 더 일상과 가까워지고, 그 인근으로 지난여름 ‘서울공예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종로를 찾은 사람들은 작품 관람 여부와 상관없이 미술관과 박물관이 마련한 ‘도심 속 쉼터’에서 발걸음을 쉬어 갈 수 있다. 바쁜 업무든 깊은 생의 고뇌든 잠시 잊고 숨을 돌릴 때마다 감사가 절로 이는 공간이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자면 이러한 공간들이 전국 각지로 확산하는 게 필요하다. 아주 작은 마을에 가도 미술관이 있기를 꿈꾼다.
‘달리와 감자탕’이라는 제목에서도 이러한 주제 의식이 익히 읽힌다. 진무학의 성장 동력이자 일터인 ‘감자탕’은 우리가 먹고사는 세상이다. 김달리의 달리는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서 따왔고, 예술을 뜻한다. 우리의 각박한 세상살이에 문화와 예술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감독 이정향, 1998)이 연상되는 제목이다. 춘희(심은하 분)와 철수(이성재 분)가 합작으로 쓰는 소설 속 주인공 다혜(송선미 분)가 미술관 안내원이고, 다혜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수의사 인공(안성기 분)을 짝사랑한다. 미술관과 동물원은 영화 속 소설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춘희와 철수 혹은 여자와 남자의 성향을 대변하는 말이다. 춘희는 순수하게 바라보기만 하며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플라토닉 러브 ‘미술관’이고, 철수는 자고로 사랑은 체온을 나눠야 한다고 여기는 에로스 ‘동물원’이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상호보완되어야 하는 사랑을 영화는 말한다.
‘달리’와 ‘미술관’, ‘감자탕’과 ‘동물원’이 결코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미술관 옆에 동물원이 또 동물원 옆에 미술관이 있어야 하듯, 우리의 세상살이 감자탕에 문화와 예술 달리가 가까이 함께해야 한다는 ‘공존’의 메시지는 같다. 사실 ‘달리와 감자탕’에서는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부터 20여 년이 흐르면서 변한 성평등 감수성이 반영돼 있다. 달리는 더 이상 춘희처럼 정신적 사랑만을 추구하지 않고, 무학은 철수처럼 본능을 우선하지 않는다. 되레 첫 키스와 첫날밤을 긴장과 설렘 속에 준비하는 건 무학이다.
제목뿐 아니라 드라마 전개와 결에서도 일상에 예술을 심으려는 연출자의 의지는 또렷하게 보인다. 단순히 매회 드라마가 끝날 때 마지막 장면들이 유화처럼 표현된 형식에서만이 아니다. 삼각관계도 나오고 재벌도 정치인도 형사도 마약도 나오는 ‘감자탕’ 세상을 보여주지만, 결코 유혈사태에 이를 만큼 자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점잖음의 선을 지킨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면서도 황보라를 위시해 황희, 안세하, 우희진, 유형관, 안길강, 서정연, 연우 등 에너지 넘치는 배우들 그리고 돈돈감자탕 주방 식구들의 소동을 통해 웃음과 재미를 선사하며 긴장을 늦춘다. 또 인물들의 깊은 감정이 드러나야 할 때는 충분히 카메라를 대기시켜 시청자도 함께 숨을 고르게 한다.
이러한 드라마의 특성, 기존 드라마와 완전히 다르지 않으나 예술적 터치로 분명 차별화된 지점들이 응집된 캐릭터가 진무학의 비서, ‘여미리’이다. 흔히 기업 대표의 손과 발 역할을 하는 비서는 남자였다. ‘달리와 감자탕’에서는 여자다. 성이 여 씨여서 ‘여 비서’라 불리는데, 과거 차를 나르고 책상을 닦던 제한적 기능의 ‘여비서’와는 다르게 대표의 부족함을 메우고 사업의 기획에서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관리한다. 여자인데 헤어스타일부터 양복, 구두에 이르기까지 매니시(Mannish, 여성의 옷에 남성의 이미지를 넣은 스타일) 하고, 패션 감각이 넘친다.
배우 황보라는 비서 여미리에 드라마의 차별화 포지션을 드러낸 연출자의 의중을 정확히 연기했다. 외형뿐 아니라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누나처럼 진무학을 살피고 진심으로 충성하는 모습은 기존 드라마에서 남자 비서들이 보여줬던 상명하복과는 차원이 다른 충복이다. 동시에, 무학과 달리의 청혼 키스 장면 하나만 봐도 괴성과 함께 방방 뛰며 좋아하다 못해 분수의 물을 튀기고 ‘한큐’ 한병세(안세하 분)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듯 행세하는가 하면 이제 두 사람만 놔두자며 무리를 몰아나가는 모습으로 드라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사뭇 진지한 연기를 하다가도 금세 웃음을 주고, 코미디 연기를 할 때도 애드리브로 웃음 강도를 높였다.
우리의 일상에 예술을 들어놓으려는 철학뿐 아니라 드라마라는 장르에 예술을 심으려는 의지를 ‘달리와 감자탕’ 전반에 걸쳐 살며시 붓칠해 놓은 이정섭 감독. 더욱 기대되는 건 차기작이다. 신선미와 예술적 관점을 보다 깊숙이 들여놓은 작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