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승은 가난과 어머니"
입력 2007.09.0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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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대선기획> ´유력 대통령후보, 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2>
"어린 시절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도 가족 원망하거나 좌절한 적 없어"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는 일제 강점기이던 지난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이지만, 부친(이충우씨, 81년 작고)이 1935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어머니는 대구 반야월 출신의 채태원(1964년 작고)씨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4남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 중 다섯째였던 이 후보는 원래 다른 형제들과 같이 ‘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이란 이름으로 족보에 올랐으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명박(明博)’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일본 출생에다 이름의 한자마저 일본 이름인 ‘아키히로(あきひろ)’와 같아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아버지가 조총련이다”는 등의 ‘뒷말’을 낳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향한 이 후보 가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동란으로 누이(귀애)와 막내 동생(상필)을 잃고 아버지의 실직까지 겹치면서 가세는 한층 더 기울었다.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단칸방에 온 식구가 모여 살며 술도가의 술지게미로 하루 두 끼를 때웠다.
때문에 그는 늘 홍조 띤 얼굴로 학교에선 술 냄새 풍긴다고 구박을 받았다.
이 후보는 “비록 거지였지만 아침저녁으로 동냥을 해 배불리 먹고 살던 옆집 친구가 부러웠다”고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둘째 형(상득, 현 국회부의장)이 포항의 수재로 인정받으면서 집안의 ‘희망’이 될 수 있었다.
‘소년’ 이명박은 자연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이 후보에겐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딱지치기, 구슬놀이 한 기억이 없다.
영흥초등학교 시절부터 방과 후엔 어머니와 함께 시장통에서 풀빵, 뻥튀기, 과일, 생선 등을 팔며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장터를 돌았으며,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기도 했다. 군부대 철조망 밖에서 김밥을 팔았고, 밀가루떡을 만들어 팔 땐 헌병에게 붙잡혀 매도 맞았다.”
급기야 중학교 때는 영양실조로 쓰러져 넉 달간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포항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놓고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냈다.
그래도 그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오늘날까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이 후보의 설명이다.
고교 진학을 거의 포기하려던 즈음 그는 한 은사의 도움으로 “학비는 한 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또 3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은 덕택에 ‘공짜로’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은 가난과 어머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시고 매우 가난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어머니에게선 당당함과 봉사정신을, 그리고 아버지에게선 정직함과 성실함을 배웠다.”
이 후보가 가난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였다.
우여곡절 끝에 고교 재학 시절의 얘기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할 때, 그는 교복차림에 땟국이 흐르는 얼굴로 장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한겨울에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쌀을 튀겼다.
“네가 네 힘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뭐가 부끄럽고 창피하냐. 네가 정직하다면 무엇이 창피하냐. 고개를 들고 당당해지거라.”
옆 자리에서 국화빵을 굽고 있던 어머니의 말이다.
수십년이 흐른 이후 이 후보가 서울시장 재직 시절 ‘노숙자 일자리 특강’에서 모자를 눌러쓴 노숙자들에게 제일 먼저 꺼낸 말도 바로 “모자를 조금 올려 쓰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