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취해도 깨어있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


입력 2010.07.24 08:01
수정

<강경범의 음주고사>쌀을 거절한 ´공의´ 술에 취해도 판결은 공정

인생에서 정직은 커다란 덕목이지만 그 초심을 끝까지 견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듯 하다.

지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은 비단 필자만의 욕심일까? 특히나 더욱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해야 할 교육계와 법조계의 비리를 보노라면 혼자만 의지할 곳조차 없는 외로운 신세 같아서 공연히 처량해지면서 화가 치민다.

그래서 항상 술에 취해 있었지만 판결을 내릴 때는 막힘이 없었던 남북조 시기 송(宋)나라 공의(孔顗)를 소개할까 한다.


공의(孔顗)는 자가 사원(思遠)이고, 산음(山陰)사람이다. 기개가 강직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을 위해 관직을 맡지 않았다.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역임했는데, 날마다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았지만 술에서 깨었을 때 판결하면 막힘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말했다.

“공의는 한 달이면 29일간 술에 취했지만 29일간 깨어있는 사람보다도 낫다.”(≪주전(酒顚), 취한 것이 깨어있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醉勝人醒)≫)

<태평어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으니 비교해보면 아마 공연히 꾸민 말은 아닌 듯 하다.
“공의는 강하(江夏)의 내사(內史)가 되었는데, 본성이 술을 좋아하여 늘 취하면 문득 며칠씩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항상 가난하게 살았기에 풍요하지 않았지만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부(府)의 장사(長史)가 되어서는 문서와 자문을 담당했는데, 오라고 하지 않으면 감히 나가지 않고, 가라고 하지 않으면 감히 가지 않았다. 술에 취한 날이 많았지만 정사에 밝아서 술에서 깨었을 때 판결하면 막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의는 한 달이면 29일간 술에 취했지만 29일간 깨어있는 사람보다도 낫다.’고 하였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온갖 외압과 청탁의 유혹을 이겨내고서 올바른 판결을 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항상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올바른 판결을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혹 다른 요소가 개입되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현대 사회는 시비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어서 맨 정신으로도 올바름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기에 공연히 나의 무지를 탓하는 일이 잣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의해서 볼 것은 그렇게 술에 취했지만 그는 판결할 때는 전혀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판결할 때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요한 판결을 위해서는 고의로 술에 취한 척 외압을 입막음하려 한 것일 수도 있고, 술에 취한 가운데 온통 판결문을 되뇌고 되뇌이며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방법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잘못될 여지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 정신으로도 하기 어려운 결단을 술에 빠져 살면서도 올바른 판결을 한 점은 배워도 배워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이 공의란 인물은 아주 독특한 성품을 지닌 듯 하다. 위에서 인용한 <주전>의 ‘자신을 위해 관직을 맡지 않았고(非爲己任)’, <태평어람>의 ‘오라고 하지 않으면 감히 나가지 않고, 가라고 하지 않으면 감히 가지 않았다.(不呼前不敢前, 不令去不敢去)’라는 부분을 보면, 그는 아마도 공명정대했지만 융통성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이 융통성 없는 점이 오히려 바른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의 올곧고 융통성이 없는 점은 ‘공의가 쌀을 거절하다(孔顗辭米)’라는 고사가 있으니, 고사의 진정성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고사를 살짝 들여다 보자.


공의가 경사에 있을 때 흉년이 들었다. 동생 공도존(孔道存)은 강하(江夏)의 내사(內史)를 지냈다. 형이 빈곤하게 생활하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아전을 보내서 쌀 오백 곡(斛)을 보내주었다.

공의가 아전에게 말했다. “내가 그곳에 3년을 지냈는데 관직을 그만 둘 때는 길 떠날 양식을 고려하지 않았다. 동생이 그곳에 간지 얼마나 되었다고 무슨 연유로 이러한 쌀을 얻었는가!” 마침내 호통을 치고서 쌀을 돌려 보내니 아전이 말했다. “예로부터 쌀을 실은 배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성의 쌀값이 비싸지고 이러한 지경에 처해서 공께서 장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아전은 쌀을 싣고 돌아갔다.

또 비슷한 고사가 있다.

동생 공도존(孔道存)과 종제 공도휘(孔道徽)가 휴가를 신청하고 동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의가 물가에 나가 그들을 맞이했는데, 군수품이 10여 척이나 되었다. 공의가 일부러 기뻐하는 척 하며 “나는 빈곤하여 이것들이 아주 필요해”라고 하고서, 이것들을 언덕 위로 끌어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너희들은 선비의 기풍을 더럽힐 요량이구나! 어찌 동쪽으로 와서까지 장사치처럼 행동할까?”라고 말하고, 좌우의 시종에게 모두 불사르라고 명하고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분명 이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할 친구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면을 존중하는 지음(知音)은 또한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무얼 두려워하는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족할 텐데, 뭔 놈의 욕심이 그리도 많아서 끝내 탐욕의 유혹을 끊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남사(南史),주백년(朱百年)>을 통해 그의 청렴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되짚어 보는 것으로 마칠까 한다.

주백년은……흔적을 숨기고 사람을 피했지만 오직 같은 현의 공의(孔顗)와는 우의가 두터웠다. 공의 역시 술을 좋아하여 서로 만나면 문득 질펀하게 술을 마셨다. 주백년은 집은 가난하여 모친이 겨울에 돌아가셨지만 수의에 솜조차 없었기에 이로부터 솜옷을 입지 않았다.

어느 겨울날 공의의 집에 가서 자게 되었는데 옷을 겹옷으로 입고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자게 되었는데, 공의가 침구를 가져와 덮었지만 주백년을 이를 알지 못했다. 잠결에 침구를 끌어서 몸에 덮고서 공의에게 “솜이 정말로 이상하게 따뜻하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고, 공의 역시 아주 슬퍼하였다.(<南史>권75 <열전>65)

관련기사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