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시간 가운데 1시간만 ‘자율’…그럼에도 중요한 이유는

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입력 2024.09.24 07:00
수정 2024.09.24 07:00

해수부, 23일 자율운항선박 출항식

실제 운항 과정에서 자율성 시험

AIS·레이더·위성 등 첨단기술 총동원

정부, 자율운항 국제 표준 주도 목표

국내 최초 자율운항 기술 실증에 나서는 '포스 싱가포르호' 모습.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움직이는 물체는 방향을 갖는다. 방향은 목적지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물체는 동력(엔진)을 돌리고, 동력은 사람이 제어한다.


선박도 마찬가지다. 배는 선장을 비롯한 여러 항해사의 협업으로 움직인다. 선장은 화물과 승객 운송, 어로 행위 등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총지휘 감독하고, 항해사들은 선장 지시 아래 각자 역할을 맡는다.


머지않아 이러한 역학 구도는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고도화한 기술은 선박 내 인간의 역할을 줄이고, 초정밀 ICT(정보통신기술)는 배를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도록 만든다.


23일 부산 북항 자성대 부두에서 만난 1800TEU급 컨테이너선 ‘포스 싱가포르호’는 선박 운항에 있어 사람의 역할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첫 사례다.


전장 165.5m, 높이 14.3m, 폭은 27.4m 규모 포스 싱가포르는 속력 19.5노트, 승선 인원 22명 규모의 배다. 컨테이너 운반선 평균 크기가 1만TEU를 훌쩍 넘는 만큼 크기가 큰 편은 아니다.


포스 싱가포르에서 주목받는 것은 운항 시스템이다. 포스 싱가포르는 국내 최초 개발한 ‘자율운항’ 선박이다. 고도의 정보통신기술(ICT)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시스템이 선박을 제어하고 사람의 간섭 없이 운항할 수 있는 배다. 정확히는 자율운항 기술을 시험(테스트)하기 위한 선박이다.


포스 싱가포르는 앞으로 1년간 한국~동남아 항로를 오갈 예정이다. 1년 동안 기상 및 해상 교통상황 등 안전성이 확보되는 상황에서 지능항해, 기관 자동화, 사이버보안, 운용 기술 등 핵심 기술을 점검한다.


하태범 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사업 통합사업단 부단장 설명에 따르면 포스 싱가포르는 한 번 출항하면 3주 정도 운항한다. 시간으로는 대충 504시간쯤이다. 이 가운데 자율운항을 적용하는 시간은 갈 때 30분, 올 때 30분 총 1시간 남짓을 예정하고 있다.


실제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민간 상선이다 보니 자율운항 시간은 기대에 못 미친다. 3주 운항 기간에 고작 1시간이다. 국내 최초 기술을 처음 적용하는 만큼 최대한 안전한 항로 내에서 짧은 시간 적용해야 하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모형선을 만들어 실내와 근해에서 여러 차례 모의시험을 했지만, 실제 운항하는 배에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발생하면 이는 기업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운항선박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인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장치) 모습.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미약한 첫걸음, 향후 세계 표준 기대


포스 싱가포르에 적용한 자율운항 기술은 ‘상황인식’과 ‘지능항해’ 시스템이 핵심이다. 운항 중인 배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능적’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개념이다. 모든 과정은 사람의 손이 아닌 첨단 장비가 스스로 결정한다.


상황인식 시스템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레이더와 인공위성, 카메라에 의한 다차원적 항해 방식이다. 현재 자동차에 적용된 자율주행 기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뱃머리에 장착한 레이더와 전후좌우 4개의 카메라로 항로 전·측방의 물체(다른 선박 등)를 스스로 감지한다. 인공위성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다른 선박 위치도 확인한다.


이런 정보(상황)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인간의 개입 없이 상황에 맞게 선박 스스로 ‘조타(操舵)’하는 게 지능항해 시스템이다.


결국 자율운항의 핵심은 데이터의 정확성과 안정성이다. 이를 위해 포스 싱가포르에는 2개의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장치)와 2개의 레이더, 4개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통신망이 끊어지지 않도록 근해에서는 LTE, 먼바다에서는 자체 통신장비를 활용한다.


포스 싱가포르를 통한 한국형 자율운항 선박 실증이 중요한 이유는 해당 시스템이 향후 국제표준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업계에서는 자율운항 선박이 단순 기술 발전 차원이 아니라 조선과 해운산업 근본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내다본다. 선원 부족 문제부터 운항 안전과 요율 개선 등 산업 전반의 시대적 요구라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해양수산부는 이번 실증결과를 기반으로 산·학·연·관이 협업해 국제해사기구(IMO)에서 논의 중인 자율운항 선박 국제표준(MASS code)을 선도한다는 계획이다.


국제표준 선도는 관련 산업의 경쟁 우위를 의미한다. 자율운항 선박 관련 시장은 2032년 240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 기술이 국제표준이 되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한편, 한국형 자율운항 선박 사업은 2020년부터 최근까지 사업비 약 1603억원을 투입했다. 국비 1197억, 민간 406억원이다. 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사업 통합사업단을 중심으로 민간 기업인 ‘팬오션(PAN OCEAN)’이 손을 잡고 사업을 추진해 왔다.


포스 싱가포르호는 팬오션이 운영한다. 자율운항에 필요한 각종 시스템은 POS SM이 맡는다.


이날 송명달 해수부 차관은 축사를 통해 “자율운항 선박은 해운 및 조선 분야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과 2032년 240조원 정도 규모 세계시장을 전망하는 미래 유망 신산업”이라며 “유럽과 일본 등을 중심으로 기술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제해사기구(IMO)에서는 국제표준 제정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 차관은 “앞으로 1년간 포스 싱가포르를 통해 진행할 해상 실증은 우리 기술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국제표준을 선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며 “이번 실증은 자율운항 선박 상용화를 촉진하는 밑거름이 되어 우리나라 해운과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송명달 해양수산부장관(맨 왼쪽)이 국내 최초 자율운항 실증에 나서는 '포스 싱가포르호' 조타실에서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데일리안 장정욱 기자

장정욱 기자 (cju@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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