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씩 공존하는 무섬 [조남대의 은퇴일기(57)]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4.07.30 14:25
수정 2024.07.30 16:13

청명하게 맑은 6월 말, 무한히 자유로운 한 점 구름이 되고 싶은 심정으로 탈영토화를 시도했다. 영주와 안동지역으로 문학기행을 떠난 것이다. 녹음이 짙게 드리운 산사와 서원, 유적지와 문학관을 순례하며 글감의 씨앗을 찾고 친분을 돈독히 할 기회다. 푸른 산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솔바람을 마시면서 산의 정기를 호흡했다. 산바람은 그지없이 청량했다.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조각도 예사로운 게 없다. 자연이 주는 신비에 도취되어 2박 3일 동안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무섬마을이다.


무섬마을 가옥 ⓒ

40대에서 80대까지 남녀노소가 함께했다.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온 이도, 팔십 중반을 넘긴 고령에도 많은 계단 오르는 열정을 보여준 분들도 있었다. 나였다면 저런 상황에서 함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다.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에 의지하면서까지 행사에 참석한 문인 ⓒ

드문드문 만나던 문인들과 밤이 깊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영주 무섬마을은 두 성씨姓氏가 긴 세월 함께 살아온 곳이라서인지, 외나무다리도, 시비詩碑도 하나가 아닌 두 개씩 짝을 이룬다.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정겨움과 평온함은 마치 천년의 세월을 두고 이어진 인연의 손길처럼 마음 깊이 스며든다. 고즈넉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는 고향에 온 듯한 따스함을 안겨주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문인들 ⓒ

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를 건너면 야트막한 산 아래에 초가와 기와집이 어깨동무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풍스러운 촌락이다. 사백여 년 전에 반남 박씨의 ‘박수’가 터를 잡은 이래 백여 년 후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 김씨가 들어와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담도 없이 사이좋게 살아왔다. 사랑스럽고 예쁜 증손녀를 멀리 시집 보내기 아쉬워 사위를 불러들인 것일까. 마을 삼면을 내성천이 감싸듯 휘감아 돌아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아 무섬이라고 불린다. 이런 여건이었기에 두 성씨만 모여 향약을 실천하며 전통을 이어온 것이 아니겠는가. 40여 년 전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교량이 생기고서야 섬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리. 고즈넉함과 그 속에 깃든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은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진 한 편의 서정시와도 같다.


초가와 기와집이 어우러져 있는 무섬마을 ⓒ

3년 전 아내와 함께 무섬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구불구불한 외나무다리가 눈 앞에 펼쳐지자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아득한 선경의 세계가 이런 것이 아닐까. 150미터쯤 되는 외나무다리는 삼 분의 이쯤 물에 잠겨 있고 나머지는 모래사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마치 기다란 용이 물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아내를 모델 삼아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 다시 찾으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어릴 때 건넜던 외나무다리나 징검다리가 생각났는지 문인들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연로한 탓에 물살이 거칠어 어지럽다며 중간쯤도 가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성큼성큼 건너가 보고 싶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모양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말이 떠오른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
무섬마을 제2의 외나무다리 ⓒ

무섬마을에는 외나무다리가 두 개다. 마을 앞에 놓인 긴 다리와 좀 더 아래에는 제2 외나무다리다. 지난번에 왔을 때 아래 다리는 끊어진 채 있었는데 이번에는 복구하여 건재하다. 홍수에 다리가 떠내려가서 꼼짝없이 갇히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예비로 하나 더 만들어 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지만, 지난 350여 년 동안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으리라. 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이자, 새색시 시집오는 길이며, 황천길을 가는 상여도 겨우 발 하나 걸칠 수 있는 이 다리를 어김없이 건너가야 했다. 건너다보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다행스럽게 이곳 외나무다리 곳곳에는 비껴갈 수 있는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가 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기도 하고, 걸터앉아 정담을 나누기도 했으리라. 홍수 때면 다리가 떠내려가 매년 다시 놓으며 사백 년을 지켜왔다니 주민들의 불편함과 수고스러움이 어슴푸레 짐작된다.


무섬자료전시관 앞마당에는 크기가 비슷한 시비 두 개가 다정스럽게 서 있다. 그중 하나는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동탁 조지훈 시비다. 경북 영양 출신이지만 혜화전문학교 시절 무섬 출신 김난희와 결혼 후 방학 때마다 이곳에 내려와 강변 모래밭을 거닐며 시심을 다듬었으리. 시 곳곳에는 무섬마을과 관련된 시어와 일화가 깃들어 있다. 특히 <별리>라는 시에는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와 같이 무섬마을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지역 문인들이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시비 글씨는 동탁 부인이 직접 썼기에 더욱 의미가 깊으리라.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세워진 두 가문이 비 ⓒ

선성 김씨 사위인 조지훈의 시비가 세워지자 입향시조인 반남 박씨 집안에서 자신 조상 시비도 세워달라는 요청을 했단다. 두 성씨가 사이좋게 살아온 마을에 처가 쪽 시비만 세워진 것을 볼 때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당국에서는 박씨 집안 측 의견을 받아들여 입향시조 박수가 지은 아름다운 무섬에 살 곳을 마련한 것을 노래한 ‘복거’卜居라는 제목의 시비를 세웠다. 삼백 년 이상 두 성씨가 정답게 지내왔고 두 시비가 나란하듯이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오순도순 살아가지 않을까.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오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켜주는 비켜다리 ⓒ

삼면이 내성천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두 개의 외나무다리를 통해서만 외부로 오갈 수 있는 불편함을 감내해 왔다. 그 덕분에 마을 고유의 향약을 지키고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두 성씨가 삼백 년 이상 친인척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집성촌은 흔치 않다. 상대방 조상의 시비를 함께 세우는 겸양지덕의 미덕을 갖춘 곳이기에 오늘날까지 전통마을로 보존되어 관광객들에게 즐거움과 여유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옛 향기를 맛보고자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기쁨을 줄 오래된 한옥과 향약을 생각한다. 사이좋은 두 성씨의 두 시비 앞에서 유추되는 이 환상의 콤비네이션이 얼마나 신박한가.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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