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K-재벌가 이야기로 재탄생한 고전…연극 ‘벚꽃동산’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4.06.30 10:26 수정 2024.06.30 10:27

미국으로 떠났던 재벌3세 송도영(전도연)이 딸 강해나(이지혜)와 함께 귀국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 집은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16살 도영에게 아버지가 준 선물이다. 하지만 오빠 송재영(손상규)의 경영 실책으로 대를 이어 세습된 송씨 가문의 기업은 파산 위기에 처하고, 아름다운 저택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송씨 가문의 운전기사로 복무했던 황씨의 아들인 사업가 황두식(박해수)은 도영의 집과 기업을 지킬 방법으로 벚꽃동산의 재개발을 제안한다.


ⓒLG아트센터 서울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6개월 전 무대에 올린 마지막 작품이다. 원작은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등장을 외면하다 몰락한 귀족 가문 이야기다. 그간 고전을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춰 각색해 공연해온 것으로 유명한 사이먼 스톤 연출은 120년 전의 러시아를 2024년 서울로 옮겨왔다.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모자를 쓴 체호프 시대 인물이 아닌, 오늘의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무대에 그려진다.


구체적으론 아들을 잃은 상처를 가진 지주의 딸 라넵스카야(류바)는 과거의 아픔을 술로 버티는 송도영으로, 농노 출신의 상인 로빠한은 선대 회장을 모시던 운전기사의 아들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황두식으로 설정하는 식이다. 또 원작의 하녀 두나샤를 가정부 정두나(박유림), 젊은 하인 야사를 운전기사 신예빈(이세준)으로 바꾸고 송도영의 개인 비서 이주동(이주원)을 등장시키면서 이들의 삼각관계를 그려넣기도 했다.


즉 몰락한 지주 대신 파산 위기를 맞은 한국 재벌가의 이야기로 바꾼 것인데, 전체적으로 인물은 원작과 유사하면서도 현재를 사는 한국 사람의 이야기와도 맞아 떨어져 고전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임에도 난해하지 않게 받아들이기 충분하다. 더구나 배우들과 캐릭터의 케미도 매우 높다.


‘벚꽃동산’은 초연임에도 매우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대사나 유머가 자연스럽고, 희비극을 넘나들면서도 이질감이 전혀 없다. 무대가 주는 압도감도 상당하다. 건축 디자이너 사울 킴이 참여한 삼각형 구조의 저택은 굉장히 미니멀하게 보이지만, 지붕이나 가파른 계단, 계단 아래의 좁은 자투리 공간까지 각 공간은 배우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작품 공개 전부터 캐스팅이 화제를 모았던 만큼, 배우들은 연기력으로 그 화제성을 이어가고 있다. 손상규, 유병훈 등이 탄탄하게 극의 무게감을 잡고 매체와 무대를 오가는 박해수, 27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 전도연의 연기 내공이 시너지를 낸다. 그리고 최희서, 이지혜, 남윤호 등 젊은 배우들도 각자의 역할을 매우 열정적으로 해낸다. 오랜만에 무대와 연출, 배우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아름다운 작품의 등장이다. 7월7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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