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이재용 사라지고 포스코‧KT 꼴 나길 원하나 [박영국의 디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입력 2024.01.23 11:36
수정 2024.01.23 18:33

진보 시민‧노동단체, 이재용 1심 선고 앞두고 '엄벌' 주장

삼성의 포스코‧KT化가 우리 경제‧민생에 미칠 영향 생각해야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인근에서 열린 삼성물산 불법합병 사건 1심 이재용 회장 엄벌 촉구 탄원서 제출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삼성그룹 불법 합병 및 회계 부정’ 사건 1심 선고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던 지난 22일. 진보시민단체와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공판 장소인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재용 회장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사건의 선고기일은 2월 5일로 변경됐지만, 이들 단체는 재판부에 이재용 회장 엄벌 촉구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시위 피켓에 적힌 명단을 보면 누구든 ‘그 자리에 있을 만하다’고 생각할 만한 단체들이 즐비하다. 양대 노총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위시해 경제개혁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금융정의연대,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등 진보 시민단체들이 총 출동했다.


하나같이 그동안 ‘재벌 타도’를 외치고 ‘재벌 중심의 지배구조 타파’를 주장해온 이들이다. 국내 최대 재벌기업인 삼성과, 대표적인 재벌인 이재용 회장에 대한 이들의 맹목적 반감은 특히나 각별(?)하다. 이 회장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던 장소에 이들이 등장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기업 지배구조에서 재벌을 배제하고 삼성에서 이재용을 쫓아 내길 주장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그럼, 그 다음은 어쩌자는 것일까.


과도한 상속세로 인해 대를 이을수록 희석된 낮은 지분율로 간신히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총수가 쫓겨난 국내 대기업은 해외 투기자본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글로벌 브랜드가치 5대 기업이자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최상위 스마트폰‧가전 사업을 거느린 삼성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해온 기업을 순순히 해외에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부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한다고 해도, 국내 대기업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경우 으레 그래왔듯이 투기자본들이 신나게 판을 흔들고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겨 빠져나가는 것까지 막진 못한다.


외국 기업으로의 적대적 M&A 요인을 배제한다면, 총수 잃은 대기업의 지배구조는 국민연금이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나머지는 기관 및 일반 투자들에게 분산된, 이른바 ‘소유분산기업’의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포스코그룹과 KT가 대표적이다.


포스코그룹은 최근 차기 CEO 선임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현 최정우 회장이 각종 논란 속에 등 떠밀리듯 3연임을 포기한 가운데, 차기 CEO 선임 절차를 주관하는 CEO 후보추천위원회(후추위) 전원과 유력 내부 후보군들은 해외 호화 출장 사태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누가 봐도 미묘한 시기에 터진 일이기에 ‘보이지 않는 손’이 포스코그룹 수장 선임을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앞서 KT의 경우도 지난해 구현모 전 대표의 연임이 외압으로 좌절된 데 이어 사외이사진 5명이 사퇴하는 등 진통 끝에야 현 김영섭 대표의 선임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장기 경영공백 사태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두 회사 모두 어떤 CEO 체제에서건 ‘적폐 세력이 카르텔을 형성해 사익을 추구한다’는 논란에 휘말렸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걸 빌미로 CEO 교체 압력이 가해졌다.


적폐의 득세건, 실적과 무관한 외압에 따른 CEO 교체건, 정상적인 기업에서 벌어질 일은 아니다. ‘주인 없는 회사’ 취급을 받기에 내부에서 좀먹고 외부에서 뒤흔드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삼성이 주인 없는 회사, 좀 더 세련된 용어로 소유분산기업이 된다고 생각해 보자.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하고,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TSMC를 맹추격하며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과 자웅을 겨루는 일이 가능할까.


모두 장기적 안목과 전략적 경영판단,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일들이다. 업계에서의 리더십과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총수의 맨파워도 중요하다. 3~5년 주기로 교체되는, 불안한 입지에 정권과 여론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전문경영인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긴 힘들다.


여러 분야에서 1등 기업으로 불려온 삼성이지만, 산업 패러다임이 급속도로 바뀌는 글로벌 무대에서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며 뛰고 또 뛰어야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입지가 불안한 CEO의 망설임이나, 심지어 CEO 공백 사태로 인해 잠시라도 주춤할 경우 순식간에 힘 빠진 공룡으로 전락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우리 경제와 민생에 긍정적 영향을 행사하려는 시민단체라면 ‘타도 이재용’이라는 타성적 구호를 외치기 전에, 이재용이 사라진 삼성의 모습, 그리고 삼성의 포스코‧KT화(化)가 우리 경제와 민생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해보길 바란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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