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세, 명배우가 명장면을 만든다 [홍종선의 명장면➃]
입력 2024.01.08 08:32
수정 2024.01.08 21:32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최이재의 9번째 환생인물 안지형
이재ㆍ건우ㆍ지형 3명이 동시에 서리는 명연
명장면이 탄생하려면 대본부터 연출, 스태프의 사전 준비에서 현장 실행, 그렇게 마련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기, 그 모든 것을 오롯이 담아내는 촬영, 그리고 사후 편집과 음악에 효과 등 사후 제작까지 많은 요소가 최상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최대한의 정성 속에 동일한 완성도로 제작되는 드라마 안에서 명장면은 한정돼 있다. 애초 기능적으로 필요한 장면이어서 명장면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명장면일 수 있었지만 미흡하게 마무리되고야 만 경우도 있다.
이때도 여러 제작 요소가 관여되지만 결정적 변수는 배우다. 작가들이나 감독들이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를 갈망하는 이유이고, 누구나 잘되지 못하고 몇몇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배경이다. '믿고 보는 배우'의 탄생이다.
'믿고 보는 배우'라고 해서 등판할 때마다 완봉승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타석에 들어설 때마가 출루하는 것도 아니고 매번 홈런은 더더욱 아니다.
드물게, 실망감을 거의 주지 않는 배우들이 있다. 오정세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런 오정세도 처음부터 잘나가는 배우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배우 송강호와 연기하게 되는 것도 아주 오래 걸렸다. '우아한 세계'(2007)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편집됐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오디션을 봤지만 떨어졌고, '하울링'(2012) 오디션도 떨어졌다. '우아한 세계'으로만 따져도 '거미집'(2023)까지 16년이다.
지금 생각하면 오정세를 선택하지 않은 감독에게 손해다. 그때는 덜 영글었겠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떡잎'부터 달랐다. 오늘의 오정세를 가능하게 했던 '연기 농사' 혹은 '캐릭터 저축'의 에피소드가 있다.
"예전에 단역 오디션을 보면 쪽대본을 받아요. 제가(마치 이미 그 인물이 된 듯) 희극적 인물인지 양아치인지, 한 장면이 나오는 지 열 신이 나오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준비하는 거예요. 근데 오디션에서 수백, 수천 명을 이기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해요. 그래서 그 인물의 이력서랄까 소개서를 써 보는 거예요.인물의 전사(이전 역사), 좋아하는 색깔, 혈액형, 고향까지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고향을 가보기도 해요. 오디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작업일 수 있지만, 오디션 준비를 위해 더는 할 게 없어서 가는 것이기도 하고 제게는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정답은 못 찾지만, 저는 부족하고 방법을 모르니까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 같아요. (캐릭터에게 똑똑)노크를 하면서, 매번 다른 방법으로 캐릭터에게 다가가고 찾아가는 거죠." (영화 '거미집' 인터뷰)
과연 누구나 이토록 지독한 '캐릭터 찾기'를 할까. 오정세만 하지는 않겠지만, 드문 일이다. 드물게 거의 실망감을 주지 않는 배우가 된 시작점이다.
티빙에서 볼 수 있는 8부작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각본ㆍ연출 하병훈, 제작 SLLㆍ스튜디오Nㆍ사람엔터테인먼트)에서도 오정세는 시쳇말(그 시대에 유행하는 말)로 '역시는 역시'를 확인시킨다. 서인국, 박소담을 선두로 최이재(서인국 분)가 환생한 열두 인물들 모두가 좋은 연기를 펼쳤다. 피로 그림을 그리는 사이코패스 화가 정규철 역의 김재욱을 비롯해 10대 연기자 김강훈까지 물 샐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명장면은 오정세가 연기한 안지형 형사 이야기에서 만났다. 제 몸을 지키라는 어머니 말씀 잘 듣는 효자로 살다 자기밖에 모르는 '보신주의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온 안지형.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 몸 안으로 최이재가 들어오면서 죽기살기로 정의로운 형사로 급변한다.
급격한 캐릭터 변화를 물 흐르듯이 연기한 것을 두고 명장면이라 하지는 않겠다. 안지형이 이지수(고윤정 분)의 납골당 앞에 선 장면.
"내 손을 잡아준 게 너구나!"
어쩌면 아주 간단한 대사다. 순간 전율이 일었던 건 시청자의 집중을 도와주는 음악, 안지형이 얼굴을 클로즈업한 촬영의 도움도 있지만. 시청자를 화면 안으로 납치하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앞에 세우는 오정세의 연기, 시청 중이던 나를 이지수로 만들어 분토된 백골이어도 귀를 만들어 귀기울이게 하는 몰입감 최고의 연기 덕분이다.
그리고! 순간 세 명이 겹쳐 보였다. 모델 장건우(이도현 분)의 기억을 통해, 박태우(김지훈 분)로 인해 비극을 맞은 순간 지수가 건우의 손을 잡음으로써 "자신이 이재"라는 건우의 말을 믿어준 것임을 깨달은 이재가, 지형의 입을 통해 말한 것인데.
놀랍게도, 이게 가능한가 싶은데, 건우의 기억을 타고 진실을 깨달은 이재가 분명 지형의 얼굴에 서렸다. 세 영혼의 동거, 명배우 오정세가 있어 가능한 장면이다. 다시 소름이 돋는다.
명배우가 있어 명장면이 탄생하고, 명장면 덕에 작품 전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다. 명배우가 있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