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의혹 없는 저지, 깨끗한 홈런으로 내린 판결[김태훈의 챕터투]
입력 2022.09.24 07:01
수정 2022.09.23 20:39
약물 의혹에서 자유로운 애런 저지, 60홈런 고지 밟아
약물로 얼룩진 홈런왕들에 배신감 느꼈던 팬들도 ‘인정’
깨끗한 홈런으로 정정당당함의 고귀한 가치 조명
“멀리~멀리~넘어갔습니다. 저지가 베이비 루스 곁에 섰습니다.”
지난 21일(한국시각) 미국 뉴욕 양키스타디움. 9회말 에런 저지(30·뉴욕 양키스) 배트에 맞은 공이 펜스를 넘어간 순간 현지 중계진이 외친 말이다.
역전까지는 4점을 더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양키스 선수들과 팬들은 마치 끝내기 홈런이 터진 것처럼 환호했다.
양키스타디움 우측 외야에 자리한 '판사'라는 뜻의 이름을 딴 저지 응원 전용 공간(judge's chambers) 역시 요란했다. 반대편 외야 관중석에서는 홈런볼을 잡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MLB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홈런이기 때문이다.
14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MLB에서 한 시즌 60홈런은 베이비 루스·로저 매리스·배리 본즈·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 그리고 저지까지 6명뿐이다.
MLB 사무국은 이들의 홈런을 모두 공식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팬들은 그렇지 않다. “본즈, 맥과이어, 소사의 기록은 약물에 오염됐다”며 “로저 매리스 이후 61년 만에 60홈런 타자(저지)가 탄생했다”고 표현한다.
2000년대 초반 MLB 무대를 뒤흔든 ‘약물 스캔들’은 사실로 드러났고, 2005년부터는 도핑 검사가 엄격해졌다. 그 이후로 한 시즌 60홈런 고지에 오른 타자는 1명도 없었다.
“메이저리거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실망한 팬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동시에 ‘청정 홈런왕’을 기다리는 팬들의 열망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커졌는데 저지가 그 주인공이 됐다.
‘MLB 홈런왕’ 배리 본즈가 은퇴 시즌인 2007년 쏘아 올린 개인 통산 762호 홈런공은 세월이 흐를수록 경매에서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금지약물에 오염된 홈런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불명예를 뒤집어 쓴 최고의 스타들의 명예의 전당 입성도 좌절되고 있다.
“그래도 대단한 성과”라고 옹호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넘어갔던 금지약물복용에 대한 팬들의 인식과 그로 인해 형성된 잣대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포츠가 선사하는 짜릿한 승부와 진정한 감동을 파괴하는 약물 홈런은 팬들이 가슴으로 쓴 기록지에는 *로 남을 뿐이다. 진정한 별이 된 저지는 스포츠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는 정정당당함의 고귀한 가치를 깨끗한 홈런으로 조명했다. 국민적 환멸을 안겼던 배신의 홈런왕들을 깨끗한 홈런으로 심판한 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