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㉑] 슬기로운 감빵생활 속 연애의 발견(박해수♡정수정)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2.02.28 11:10
수정 2022.04.21 10:01

드라마를 보다가 “어, 저거 내가 했던 말인데”, 혹은 “내 얘긴데” 했던 공감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부모와 자식처럼 세세한 양상은 다르더라도 본질이 같은 관계와 상황과 일들이 있다. 또는 작가가 그 관계나 상황이나 일을 직접 겪은 바 있거나 그것에 대한 성찰이 깊어서다.


어떤 면에선 부모와 자식보다 더욱, 연인들의 사랑은 공통적 본질과 속성을 띤다. 연애야말로 100짝 100색이지만, 동시에 인구통계학적 특성에 아랑곳없이 공통적 성질을 보이곤 한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연출 신원호, 극본 정보훈)은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야구선수가 동생의 성폭행 사건을 목격하고 가해자를 추격해 잡으려다 벌어진 폭행 사건으로 구치소를 거쳐 교도소에 들어가 겪는 일이다. 성폭행 가해자이자 폭행 피해자가 끝내 사망, 폭행 치사 살인자가 된 스타 투수가 감방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만난 수감자, 교도관뿐 아니라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관계가 달라진 감옥 밖의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인생의 균형’을 잡아가는 이야기다.


제1 주제는 아니더라도 인생사 빠질 수 없는 사랑이 스타 투수 김제혁(박해수 분)의 갱생기에도 담겼다. 아니 어떤 면에선, 다른 인간관계나 난관은 인간 김제혁의 기존 스타일대로 헤쳐가지만, 남자 김제혁으로서는 거듭난다는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수준의 변화와 성장을 보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는 담장 밖의 김지호(정수정 분)다.


12화를 보면 제혁과 지호의 연애 상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멜로드라마가 아닌 상황에서, 사랑에 관해 얘기하면서 딱 하나 뽑아 올린 ‘문제’. 각자는 더할 나위 없이 잘사는 두 사람을 헤어지게 했고 많은 사랑을 갈라놓았을 그 지점을 정보훈 작가는 기막히게 짚었다.


블론(블론세이브, 투수가 세이브 상황에서 동점이나 역전을 허용한 것)을 당한 김제혁이 소위 잠수를 탄 상황. 제혁은 지호의 계속된 연락에도 답장 한번 없이 두문불출하다가 어느 날 문득 지호의 집 앞에서 기다린다. 두 경기 만에 세이브에 성공하고 지호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제혁: 늦어서 미안해. 아직 오늘 안 지났지? 생일 축하해. 미안, 그동안 연락 못 해서.


지호: 괜찮아, 이해해. 난 오빠 많이 사랑하니까, 다 이해해. 오빠 경기 질 때마다 연락 안 되는 것도, 어깨 통증 있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것도, 난 다 이해해.

… …, 근데 오빠, 우리 헤어지자. 우리 헤어져, 오빠. 내가 너무 자존심 상해서 그래. 나 (하루) 종일 오빠 연락만 기다리거든. 아무 일도 못 해.


제혁: 미안해, 지호야. 근데 지호야. 나 힘들다고 너까지 힘들게 하기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미안해.


지호: 왜, 내 생각까지 오빠가 해. 내 생각은 내가 알아서 하게 둬. 그리고 오빠 그거 핑계인 거 알지? 나도 그래. 나도 힘들면 아무도 안 만나고 싶고, 아무 얘기도 하기 싫어. 그래도 난 그때도 오빠 생각, 나던데. 난 만날 만날 오빠 생각나고 신경 쓰이고 그러는데, 오빠는 안 그런가 봐. 내가 너무 불쌍해서 안 되겠어. 나 이제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나 너무 힘들어.

… 케잌은 잘 먹을게. 고마워.

… (가다가 뒤돌아서서) 아, 참. 오빠 근데, 내 생일은 어제야.


정말 많은 연인에게서 일어났을 상황. 여기서 핵심은 생일을 착각했거나 선물을 사 오지 않은 게 아니다. 인생 위기, 고난, 힘겨운 일에 대처하는 태도 차에서 오는 갈등이다. 숱한 제혁들이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동굴 속으로 숨는다. 설사 몸까지 감추지 않았다고 해도 마음은 동굴 속에 숨는다.


맞다, 많은 지호가 이해한다. 사랑하니까 그 습성을 다 이해한다. 이해한다면서 왜 헤어지자고 하느냐고? 앞뒤가 맞지 않다고? 지호들도 부처님은 아니어서 그렇다. 감정을 지닌 사람이어서 그렇다. 어디서 감정이 상했느냐고? 가장 힘들 때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내 위로를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상처받는 거다.


힘들 때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지호도 사랑하고 난 후부턴 제혁 오빠가 제일 먼저 생각나고, 제혁 오빠의 위로 한마디면 힘든 상황은 같아도 기운이 돌고 문제를 헤쳐갈 힘이 날 것 같은데, 상대는 같은 상황에서 나를 찾지 않을 때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자존심을 말하지만, 속마음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아직 둘인가, 하나가 아닌가 싶은 데서 오는 외로움.


사람마다 다르니까 동굴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되느냐고 말할 수 있다. 애써 진흙탕에 같이 빠지지 말고 마른 땅에서 고이 기다리다가 나 스스로 늪을 빠져나오면 그때 같이 웃자고 말할 수 있다. 고통에 허우적대는 게 눈앞에 보이는데, 보이지 않아도 다 아는데 두 손 놓고 기다릴 수 있을까. 전전긍긍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웃는 것도 그렇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도 괴로울 판에 내 손을 뿌리치는 상대에게 상처받아 울고 있는데 이제 괜찮다고, 동굴에서 나왔으니 같이 웃자고 하면 갑자기 웃어질까. 함께 안간힘 쓰며 늪에서 빠져나왔어야 함께해 낸 성취감에 같이 땀 닦으며 함께 웃을 수 있다. 사랑은 주는 것만도 아니고 받는 것만도 아니고 함께하는 것이다.


너까지 힘들게 하기 싫었어. 이 말이 아직도 멋지게 들린다면, 감히 말하건데 그건 사랑이 아니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힘든 상황이 되면 나를 밀어내는 게 더 힘들고 비참한 법이다. 더 힘들게 해 놓고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건 핑계를 넘어 이기적 자기변명이다. 힘들 때면 남을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고 그렇게 하기 성가실 뿐인 거다. 내가 힘든 순간에 얼른 만나고 싶은 얼굴이 있고, 그 힘듦을 같이 하지 않을 때 상대가 느낄 슬픔을 배려해 내 곁을 내주는 게 사랑이다.


이렇게 연애의 기초도 모르는 우리의 제혁은 어떻게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을까. 케이크 사 들고 갔다가 지호에게 이별 선고를 받고 바로 깨달았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잘나가는 특급 투수일 때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게 됐을 때, 이미 공식적으로는 헤어졌음에도 그 힘겨움을 함께하려 지호가 찾아왔을 때도 제혁은 습성대로 지호를 밀어냈다.


“지호야, 앞으론 접견 오지 마. 우리 헤어졌어. 그러니 두 번 다시 여기 오지 마. 나, 너 안 보고 싶어!”


혼자서 또 멋지고 싶은 우리의 제혁 씨. 안다, 김제혁식 배려라는 거. 소중한 지호가 교도소 들락거리는 거 죽기보다 싫은 거다. 그러나, 정말 그뿐일까. 죄수복 입은 모습, 초라한 자신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건 아닌가. 세상의 많은 ‘제혁이’들은 자신의 실패를 잊으려 하고 아니 진정 없던 일로 잊어버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 합리화의 논거를 쌓는다. 근데 알까 모르겠다. 다 보인다, 그 어수룩한 회피와 변명들. 차라리 실수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실패의 결과를 해결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게 더 멋져 보인다.


김제혁도 그랬다. 본인이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뱉어 놓고 김지호가 정말 오지 않자 피가 마르는 건 수인인 제혁이다. 지호는 빡빡한 한의대 공부에 장학금으로든 아르바이트로든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해서 바쁘다. 밀어내고 외면할 줄 몰라서 제혁에게 계속 손을 내밀었던 게 아니다. 지호가 발길을 끊자 제혁은 초췌한 병자를 넘어 안절부절 바보가 되어 간다. 그리고…, 지호가 찾아오자 사람으로 회복한다. 사람은 혼자일 때보다 둘일 때 온전하다.


제혁과 지호의 사랑 얘기를 축으로 다시 봐도 쏠쏠한 재미가 있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tvN에서는 종영했지만, 인터넷TV 티빙과 넷플릭스에서 계속 볼 수 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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