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㊻] 병인양요 결과 가른 소총 사거리‧사격 방식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1.09.14 14:01
수정 2021.09.14 12:02

조선 후기 조선인들의 눈에 서양 무기의 위력은 얼마나 압도적이었을까.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맞서 싸운 양헌수의 기록으로 이를 약간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다.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무기 위력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밤에 등불을 들고 나갔다. 그 불빛을 보고 프랑스군이 대포를 발사했다. 염하 너머에서 쏜 포탄이었다. 양헌수가 일기에 기록한 표현을 빌리자면 ‘벽력같은 대포 소리가 울렸다. 포탄이 독수리처럼 머리 위를 휙 지나갔고 불빛이 번쩍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고 한다. 양헌수가 이런 모험을 한 이유는 프랑스군의 화포가 20리나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헌수는 덕포진을 통해 손돌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령했다. 프랑스군이 쏜 포탄을 확인해 본 결과 작은 것은 6~7촌(약 18cm), 큰 것은 1척(약 30cm)에 달해 매우 위력적이었지만, 당시 조선군의 화포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포의 사거리 역시 포의 앙각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양헌수는 정족산성의 지형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이 정족산성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력을 파견했고, 양측의 전투가 벌어졌다. 양헌수는 프랑스군이 화승도 없이 총을 쏘는데, 그 사정거리가 500보에 이른다고 했다. 이 기록은 당시 조선군의 주력 무기였던 조총과 프랑스군이 사용한 총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조총은 흔히 화승총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화승이 특징적이었기 때문이다. 화승총은 총구에 화약과 탄환을 집어넣고 긴 꽂을대로 다져 놓은 후에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하면서 탄환이 발사되는 형태이다. 이때 화승은 사격할 때 화약을 터트리기 위해 불을 붙여 놓은 노끈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총에는 이 화승이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도 이미 수석식 소총이 존재했기 때문에 화승이 없는 소총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소총 역시 총구로 장전하는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헌수가 보기에 외형상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결정적 차이는 사거리에 있었다. 사거리 차이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소총의 총열에는 강선이 있고, 탄환이 구슬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발생했다. 프랑스군은 이른바 ‘미니에 탄’이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군이 미니에 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1849년부터 미니에 소총을 사용했다. 그리고 1853년 일어난 크림전쟁은 미니에 소총의 진가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미니에 탄을 사용하는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러시아군은 강선이 없는 기존 활강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특히 활강식 소총은 도달하기조차 어려운 거리에서도 미니에 소총으로 사격하면 탁월한 명중률을 보여줬다.


흔히 물러설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이라는 표현이 여기서부터 유래했다. 미니에 소총이 등장하기 전, 군대에서는 기존 활강식 소총의 느린 장전 속도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 4열 종대의 밀집대형으로 정렬해 상대와 마주보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개시되면 첫 열이 먼저 사격하고, 다음 열이 차례대로 사격하였다. 이때 사격을 마친 열은 장전을 준비해 다시 차례가 돌아오면 사격을 하고, 만일 사격 도중 돌격 지시가 내려지면 함성과 함께 돌격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크림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은 러시아 기병이 돌격하자 기존의 절반인 2열 종대로 대응했다. 물론 영국군의 전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활강식 소총보다 먼 거리에서 사격할 수 있다는 점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것은 더 이상 서로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평지에서 마주보고 밀집대형으로 정렬한 상태에서 일제 사격을 하는 식의 전술이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양헌수가 훈련도감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를 향했다면 병인양요는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훈련도감에서는 정렬하여 대형을 갖추고 사격하는 식의 훈련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헌수가 정족산성으로 이끌고 간 병력은 산포수였다. 이들은 정족산성과 지형지물에 의지했고, 접근하는 프랑스군을 조준하여 사격하는 식으로 전투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 당시 조선군이 지형지물을 이용하며 신출귀몰하였다고 기록했다.


애초에 조선의 지형에는 산이 많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면 원거리 사격이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조선이 한정된 군사적 자원 속에서도 오랜 기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지혜가 밑바탕에 있었던 것 같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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