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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㊺] 180년 전, 영국은 왜 아프간을 공격했나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1.09.07 14:01
수정 2021.09.07 08:49

1차 아프간-앵글로 전쟁(1839~1842)

지난 8월 30일(현지 시각) 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공항에서 미군의 마지막 수송기가 이륙하면서 아프간에서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사실상 초강대국 미국의 패배 선언이었다. 18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은 카불에서 철수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1차 아프간-앵글로 전쟁을 묘사한 그림(The remnants of an Army, Jellalabad, January 13, 1842)ⓒ위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은 2001년 9.11 테러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9.11 테러의 유력한 용의자로 알카에다를 지목했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탈레반의 보호 아래 오래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 등을 잡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반면 180년 전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대외 확장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영국 정부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하자 자국이 지배하는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삼아 러시아를 막으려 했다.


2001년 10월,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개시하여 불과 2개월 7일 만에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되었고, 지도자인 무하마드 오마르는 동부 파키스탄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축출한 이후 반탈레반 활동을 펼치던 하미드 카르자이를 지원하였고,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지원하에 수반으로 선출되어 친미 정권을 수립했다.


1838년 12월 영국은 약 2만 1000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했다. 이듬해 7월 영국군은 카불 방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카즈니 요새를 점령했다. 이후 영국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카불까지 점령했다. 카불을 지배하던 도스트 모하메드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전 국왕인 아흐마드 샤의 손자인 샤 슈자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여 두라니 왕조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샤 슈자는 영국의 지원하에 무사히 카불에 입성하였고,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여러 테러 조직과 알카에다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대이라크 전쟁을 위해 전력을 집중했고, 4월 9일에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문제는 미국이 대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대응이 소홀해졌다는 점이다. 탈레반 주력에 대한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들이 제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영국 역시 1839년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마무리하기 이전에 병력을 다시 인도로 소환했다. 왜냐하면 흔히 ‘아편전쟁’으로 잘 알려진 대중국 전쟁 때문이었다. 영국 함대는 칭다오 인근까지 북상하여 청군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청은 영국과 촨비 가조약을 체결하지만, 양국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1841년 전투가 재개되었다. 결국 1842년 영국이 양쯔강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주력은 인도군이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있는 동안 탈레반은 또 다른 수렁을 만들었다. 반면 하미드 카르자이는 미국의 기대와 달리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2021년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이후 미군 전사자만 2448명을 냈고, 비용으로 약 2조 달러를 사용했다. 미국으로서는 사실상 제2의 베트남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샤 슈자를 왕위에 올렸지만,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카불에서 폭동이 일어나면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 과정에서 카불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그 가족 그리고 영국군이 인도에서 데리고 온 민간인들까지 몰살당했다. 위의 그림은 초기에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졌던 윌리엄 브라이던을 묘사한 것이다.


180년 전 영국이든, 지금의 미국이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학에서 집중의 원칙이 갖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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