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올드무비㉜]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ft. 미나리)
입력 2021.02.28 16:06
수정 2021.02.28 16:06
죽여주는 여자, 죽여주는 사람 이어 죽여주는 배우
영화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배급 CGV 아트하우스, 2016)를 예고편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홍상수, 임상수 ‘두 상수’ 감독과 함께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던 배우가 일명 ‘박카스 아줌마’를 연기하다니! 캐릭터에 한계를 두지 않는 윤여정, 역시 배우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이재용 감독인데 뭔가 있겠지, 제목 ‘죽여주는 여자’가 일차원적 의미는 아니겠지 예상했다. 그런 기대 속에 영화를 보고도 또 놀랐다. 머리로만 생각했던 중년의 매춘 여성 역할, 그 이상의 파격적 장면들이 있었다. 소영 씨는 먹고살기 위해 오늘도 덤덤히 노인들이 모이는 공원에도 가고 남들은 여가생활로 찾는 산을 생계를 위해 오른다. 그 정도에서, 직업을 가늠케 하는 정도에서 그치겠거니 생각했다. 스타 배우 윤여정 아닌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에는 꽤 구체적으로 ‘죽여주는’ 소영 씨에 관한 소문과 기술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여자는 나이 들어도 여자인데, 더군다나 윤여정은 영화 포스터만 봐도 확인되듯 나이를 잊게 하는 젊음과 매력을 지녔는데, 이러한 설정을 수용하고 현실적으로 연기한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대단해 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나왔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사람을 여러 번 울리는, 심장을 두드리는 작품인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난 첫 번째 눈물이었다. 실제로 젊은 시절 매춘부였거나 지금 이 순간 노인을 상대로 음료 하나 건네며 말을 걸어 몸을 매개로 살아가는 중년이 아니라 해도 소영 씨는 척박한 오늘을 가진 것 없이 온몸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안겼다. 무슨 일을 하면 어떠니 괜찮아, 먹고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 아닌데 잘해 내고 있어, 소영 씨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등을 토닥이는 것만 같았다. 녹록지 않은 소영 씨의 밥벌이를 배우 윤여정이 ‘이런 게 인생이다’, 덤덤히 연기한 게 형언할 수 없는 공감과 감동을 자아냈다.
영화가 이 설정 하나로 끝났어도 박수할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영 씨는 오갈 데 없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보살폈다. 혼자 먹을 때보다 반찬 하나라도 더해서 먹였고 갑작스레 엄마와 떨어져 낯선 집에 사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살폈다. 법으로 따지면 경찰서에 데려다주고 아동보호 시설에 가게 해야 맞는 것이겠지만, 영화 안에서는 소영 씨의 허름한 집과 따뜻한 밥 그리고 보듬는 눈길이 아이를 위한 해답으로 느껴졌다. 소영 씨는 아이를 데리고 생활전선에 나섰고, 잠시 모텔 주인에게 아이를 맡기면서도 자신과 아이가 먹을 밥을 벌었다. 자신이 겪는 불편을 작게 여기고 삶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우선하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복지국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은 그 효용이 닿지 않는 사회관계망의 ‘윗목’에 ‘아랫목’의 온기를 전하는 소영 씨의 선택은 아이 돌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재용 감독은 또 하나의 ‘죽여주는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 스포일러라 상세히 말할 수 없지만 ‘고독’이라는, ‘성’이라는 것도 노인 문제의 큰 줄기인데 보다 본질적 맥락에서 노인들이 겪는 절박한 고민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여러 가지 원인과 배경 속에 삶의 연장선에서 매듭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이들의 고통이 전해져 왔고, 그 해결책으로 소영 씨를 찾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부탁을 받아들이는 소영 씨까지 모두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가 두 번째 ‘죽여주는 여자’를 향해 달려왔다면, 박수를 거두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재용 감독과 배우 윤여정은 두 가지의 의미의 죽여주는 여자와 아이 돌보는 소영 씨까지 고루 가치를 두어 연출하고 연기했다. 그 외에도 자디잔 에피소드와 표현을 통해 어떤 훌륭한 직업과 재력의 누구보다 나잇값 하는 ‘어른’의 모습, 주변을 살피는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사람’을 보여줌으로써 소영 씨가 인생 허투루 살지 않았음을 확인시켰고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윤여정이 ‘죽여주는 배우’라는 건 영화 ‘충녀’(1972) 이후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죽여주는 여자’를 보며 배우 윤여정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보았다. 과연 소영 씨를 어떤 배우가 이토록 차지게, 이토록 인상적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연기할 수 있을까.
배우 윤여정은 참 놀랍다. ‘죽여주는 여자’로 끝이 아니다. ‘윤식당’ ‘윤스테이’ 같은 예능만 계속한다 해도 대단한 배우임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듯, 인생이라는 길을 배우로 살아가고 있는 윤여정은 70대에 다시 한번 ‘나는 배우다’를 절감케 했다.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 제작 Plan B Entertainment, 수입·배급 판씨네마㈜)를 통해서다. 배우 스티븐 연(제이콥 역)과 한예리(모니카 역)의 호흡도 좋지만, 외할머니 순자 씨(윤여정 분)와 그녀를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윤여정은 정말 그렇다)라 말하는 손자 데이빗(앨런 김 분)의 어울림이 눈길을 붙든다. 통념의 할머니 모습이 아니라 연륜을 통해 인생에서 무엇이 중한지 알고 말하고 반응하는 순자 씨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데이빗에 투영된 정이삭 감독의 실화, 감독을 키운 건 8할이 외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게 손자의 마음과 몸을 단단하고 건강하게 키워주었고 많은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런 할머니를 배우 윤여정이 실감 나게 연기했고, 감동과 공감의 박수 속에 미국 각지의 영화제에서 이미 25번 수상자 호명으로 경의를 표했고 캐나다 벤쿠버비평가협회에서 26번째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수여했다. 세월을 비껴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외모, 독특한 음색과 어조, 과장하지 않지만 깊이 있는 연기, 일상 같은 연기에 담아내는 현실감이 한국을 넘어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정말, ‘죽여주는 여자’ 배우다.
‘오스카’ 얘기를 하는 사람은 피해 다닌다고 윤여정 본인은 얘기하지만, 이쯤 되고 보니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후보는 물론 수상까지 ‘한국 배우 최초’의 기쁨이 욕심나는 게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이 한때 ‘로컬(미국 지역만의) 시상식’이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던 아카데미, 세상 제일의 영화시상식은 아니지만 지난해 ‘기생충’으로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국제영화상 4관왕을 받고 보니 배우상도 추가하고 싶다. 지난 1957년, 말론 브란도 주연의 미국 영화 ‘사요나라’에 출연했던 일본 배우 유메키 미요시가 아시아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는데, 너무 오래됐다. 미국 백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한국 배우가 받을 때가 됐다.
그것이 윤여정이라면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 씨가 많은 이에게 전했던 위로처럼 아직 큰 빛을 만나지 못한 채 배우로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에서 어려운 고비를 겪고 있는 사람들(스타였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드라마 ‘전원일기’의 빨래터 아낙부터 다시 시작했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낭보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