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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㉚] 하정우-김남길과 촬영 중인 김진황 감독의 ‘양치기들’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1.02.15 01:00
수정 2021.02.14 18:13

박종환의 팔색조 연기…거짓말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영화 포스터 ⓒ이하 CGV아트하우스 제공

극장 개봉 당시보다 인터넷을 통한 OTT(Over The Top) TV를 통해 열 배, 백 배 이상의 관객이 보고 엄지를 세웠으리라 생각되는 영화들이 있다. ‘양치기들’(2015)도 그중 하나다.


영화를 보노라면 정말이지 중간에 멈출 수 없다. 극장도 아닌데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기가 싫다. 한 호흡으로 관객을 빨아들여 한달음에 엔드크레딧까지 달려가는 영화. 스릴러 ‘양치기들’의 백미는 그 불안과 긴장이 공기와 온도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영화 속 후텁지근한 열기, 기체가 아니라 뭔가 점성이 느껴지듯 끈적한 공기 안에 서 있는 느낌을 안긴다.


더 자주 보고 싶은 배우들, 차래형과 박종환(왼쪽부터) ⓒ

몸을 휘감는 끈끈한 공기와 긴장의 열기가 시나리오에 담겨 있었을까. 각본을 쓴 김진황 감독의 머릿속에는 있었을 텐데, 그것이 글로 드러났을까. 박종환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간파하고 찜찜한 불안과 그로 인한 짜증,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집요한 추적을 통해 스릴을 주도했을까. 그 곁에서 긴장을 늦췄다 부추겼다 얄미울 정도로 적절히 부채질한 차래형 역시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그 연기를 그렸을까. 김진황 감독은 두 주연과 더불어 단역까지 누구 하나 나무랄 떼 없는 이 배우들과 함께라면 이 ‘감정의 덩어리’를 굴려 영화 한 편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도대체 현장에서 어떤 디렉팅을 했길래 배우들의 최대치를 끌어내고 그것을 빌어 공기로 긴장을 빚을 수 있었을까. 시나리오를 구하고 감독에게 인터뷰를 청하는 성실을 다하지 않고, 영화를 보며 감탄만 한다.


그 게으름을 변명하자면.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상상만 하며, 오지게 재미를 만끽하며 영화를 더 보고 싶은 욕심 탓이다. 아직은 마치 처음 본 영화처럼 다시 볼 수 있다. 웬만해선 영화 두 번 보는 걸 꺼린다, 처음 볼 때의 재미와 감동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드물지만 보고 또 봐도 좋은 영화들이 있다. ‘양치기들’도 그렇다. 내가 완주(박종환 분)가 된 양, 한순간의 외면 또는 현실적 어려움에 기댄 한 번의 선택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를 이번엔 외면하지 않고 이번엔 변명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려는 내가 되어 숨 가쁘게 달려선지, 다시 봐도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한 채 처음 당한 일처럼 영화와 호흡을 같이 한다.


삼자대면. 영민(왼쪽), 광석, 그 사이에 준호를 대신해 선 완주 ⓒ

그렇다고 줄거리가 단순하거나 반대로 지리멸렬 복잡해서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이 긴장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는 기가 막히게 돌고 돌아 처음과 맞닿는다. 이야기 전개와 순환 속에서 현실에선 뒤집기 힘든 갑과 을이 ‘양치기들’ 안에선 역치 되는 순간이 오는 것에도 영화적 쾌감이 있다. 수년간 수발을 들어도 돈 앞에서 의리를 내치는 잘나가는 배우이자 교수이자 연극 제작자인 고석태(김종수 분)와 선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완주 사이의 역치, 동철(류준열 분)의 말을 빌자면 동기여서 천만다행이지 후임들에겐 악마로 군림했던 재우(이세호 분)와 구타를 넘어 성적모멸감을 당한 영민(윤정일 분)이 군대 밖에서 다시 만났을 때 각자의 사회적 배경에 의해 뒤바뀌는 위치, 그런 미묘한 지점과 균열을 김진황 감독이 파고들었다.


어쩌면 영민이 당할 때 못 본 척하고, 영민이 뒤집을 때 안 본 척 침묵하는 광석(하준 분)이 현실의 우리이기 쉽다. 생존을 이유로 침묵하는 내가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 영화를 보다 직면한다. 직면하면서도, 완주처럼 ‘그날의 진실’을 향한 추적을 응원하면서도, 현실에선 또 광석처럼 살게 될 우리를 발견한다.


미진의 가짜 애인 역을 하는 완주 ⓒ

완주가 하는 일, 그 일을 주는 사장 명우(차래형 분)의 직업도 영화적으로 신선하다. 17세기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소설 ‘시라노’에서 시라노가 남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줄 때처럼, 가짜 편지에 진짜 감정을 담듯 가짜 역할에 진짜 연기를 하는 완주. 관객 미진(김예은 분)을 팬으로 만들어 반복 관람을 하게 할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지녔지만, 고석태에게 이용만 당하자 고석태가 왕인 세상에서 뛰쳐나와 ‘역할 대행’ 직업의 세계로 왔다.


완주의 추적, 박종환의 명연 ⓒ

크게 해될 일 없는 소소한 가짜 역할을 하던 그가 ‘큰 건’에 휘말린다. 살인사건 목격자 역할, 죽은 아이의 엄마라며 찾아온 여성의 말을 믿고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거짓말 한 번의 여파는 눈덩이처럼 커져 인심 좋은 단골 횟집 주인(정은경 분)과 아들 준호(이가섭 분)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형국이 된다. 엄마 수술비 갖다 주니 오랜만에 사람 취급하는 동생(박세인 분)의 미소를 거둘 수 없어 받은 돈을 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모른 척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될까 가만있을 수도 없고. 어쨌거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잘하는 연기로 가짜 형사 행세도 하고 피해자 사촌 형 노릇도 해가며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양치기들’의 박종환에게서 설경구가 보인다는 관객 평처럼, 정말 차지게 연기했다. 짜증 섞인 불안과 덤덤한 듯 집요한 추적으로 긴장을 몰아가는 연기는 놓치기 아깝다.


그런데, 완주는 정말 피해자 엄마라는 이의 말을 믿었던 걸까, 선을 넘는 일을 하는 핑계를 댈 무엇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 완주에게 이 일을 의뢰한 자는 누구일까. 완주는 이번엔 또 어떤 역할로 누구를 만나러 갈까. ‘이번엔 찜찜함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위협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을 뿐인데, 완주에게도 한 방 날리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된다.


김진황 연출, 하정우-김남길 주연의 '야행' ⓒ '클로젯' 촬영현장.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김진황 감독을 새해에는 만나야지 다짐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직업적 명분이 기다리고 있다. 김 감독은 ‘야행’이라는 시나리오를 썼고, ‘신세계’ ‘아수라’ ‘무뢰한’ ‘돈’ ‘공작’ 등을 만든 사나이픽처스(대표 한재덕)가 제작에 나서면서 배우 하정우와 김남길이 주연으로 합류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김남길 분)의 소설이 현실이 된 것 같은 살인사건, 마치 부모 같은 마음으로 가해자 색출에 나선 피해자의 형(하정우 분), 웬일인지 용의자의 행방을 물색하는 작가, 그 둘의 평행과 교차 속에 좁혀지는 사건의 진실.


공기로 긴장을 만드는, 덕분에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구석구석 긴장이 스며드는 연출을 하는 김진황 감독인 것만으로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큰데 연기 잘하는 두 배우가 함께한다. 영화 ‘클로젯’(2020) 이후 바로 다시 만난 하정우-김남길, 전혀 다른 이야기와 연출 스타일 속에서 재회한 두 배우의 더욱 깊어질 ‘케미’와 진해질 색깔이 상상만으로 짜릿하다. 게다가 영화 ‘공작’ 제작 당시 ‘총성 없는 액션’으로 가겠다는 윤종빈 감독의 의지를 존중, 이미 촬영해 놓은 황정민의 자동차 추격부터 주지훈의 수중 격투까지 1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장면을 과감히 배제한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가 제작을 맡았으니 기대는 더욱 커질 수밖에.


감독의 방향성을 지켜주는 제작사, 신인 감독과의 작업에 거리낌이 없는 스타 배우들과 함께 상업영화로 규모가 커져도 자신의 장점을 잊지 않고 흔들림 없이 완성하는 김진황 감독의 ‘야행’이기를 응원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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