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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감독탐구⑧] 톰 포드, 인간의 상실감…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다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입력 2020.09.26 13:34 수정 2020.09.27 04:57

죽음보다 깊은 상실감. 영화 '싱글맨' 스틸컷 ⓒ하준사 제공 죽음보다 깊은 상실감. 영화 '싱글맨' 스틸컷 ⓒ하준사 제공

톰 포드는 넘치는 예술적 재능의 보유자다. 건축학도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자신의 감각을 표현하는 캔버스를 끝없이 확장하고 있다.


열 살 소년일 때 엄마를 졸라 명품 구찌의 하얀색 단화를 얻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 자신의 것으로 하는 집념이 대단하다.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건축학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 시절을 뉴욕에서 보낸 건 톰 포드의 눌려 있던 예술적 끼가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재학 중 끌로에 홍보 사무실에서의 인턴이 패션에 관한 경력의 전부였던 그가 디자이너 캐시 하드윅에게 한 달 동안 매일 전화를 걸어 면접의 기회를 얻은 일화에서도 집념이 읽힌다. 2년간 보조 디자이너로 일한 뒤 톰 포드는 마크 제이콥스가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기 전 일하고 있던 페리 엘리스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실력파 디자이너들의 감각을 흡수할 수 있었던 4년, 인생 항로 대전환의 출발선에 행운이 함께했다.


행복한 한때, 짐(매튜 구드 분)과 조지(콜런 퍼스 분, 오른쪽) ⓒ하준사 제공 행복한 한때, 짐(매튜 구드 분)과 조지(콜런 퍼스 분, 오른쪽) ⓒ하준사 제공

좀 더 큰 행운은 구찌의 경영난에서 찾아왔다. 1920년 이탈리아에서 가죽제품 상점으로 시작한 구찌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1970년대 자손들의 갈등, 80년대 럭셔리 브랜드로의 도전 실패로 존폐가 위험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구찌는 전문경영인과 크리에이디브 디렉터를 고용했다. 미국 출신이었던 디렉터는 구찌에 변화를 주기 위해 유럽에서 활동할 미국 디자이너를 찾았고, 자신의 패션 감성이 유럽풍이라고 생각했던 톰 포드는 그 손을 잡았다.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1990년 여성복 디자이너로 시작한 톰 포드에게 일이 몰렸다. 4년 뒤부터는 의류, 가방, 신발, 선글라스, 향수 등 모든 분야, 심지어 매장 디자인까지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그로부터 10년, 톰 포드는 가죽제품 위주의 구찌를 종합 패션 브랜드로 키웠고, 부와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애호 브랜드에서 젊고 감각 있는 패션피플이 선택하는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가격은 낮아졌고 젊은이들을 구매층으로 끌어들였고, 이번 시즌에 뭘 입고 뭘 들면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지 그 해답을 제시했다.


구찌를 자신이 그리던 색채와 디자인으로 완성해낸 톰 포드는 2004년 독립했다. 많은 사람이 톰(TOM)의 T가 옆으로 뉘어 새겨진 안경을 쓰고 싶어 했다. 선글라스뿐 아니라 안경도 패션으로 받아들였다. 향수도 출시하고 의류, 가방, 신발 등 모든 분야의 제품을 생산하고 2008년과 2010년에는 세계적 상도 받았지만 톰 포드는 시큰둥해 보였다. 구찌에서 너무 많은 걸 쏟은 탓인지, 명품 패션으로는 더이상 확장할 미지의 땅이 없는 것인지, 구찌 시절만큼 매 시즌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 했다.


두 고독. 조지와 찰리(줄리안 무어 분, 오른쪽) ⓒ하준사 제공 두 고독. 조지와 찰리(줄리안 무어 분, 오른쪽) ⓒ하준사 제공

대중을 놀라게 한 건 패션쇼 런웨이가 아니라 극장의 스크린에서였다. 톰 포드는 지난 2010년 영화 ‘싱글맨’으로 감독 데뷔했다. 잘생긴 외모로 영화에 출연한 적은 있었지만 연출은 처음이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연출한 영화답게 콜린 퍼스(조지 역), 매튜 구드(짐 역), 줄리안 무어(찰리 역) 등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의 의상과 액세서리까지 완벽했다. 조지와 짐이 함께 사는 집 자체, 그곳에 걸린 그림 하나, 장식물 하나, 생활소품 하나하나가 예술적 미장센을 구성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의상과 미술, 미장센 등 시각적 요소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가 한 것 치고’가 아니라 어느 감독이 연출했다 해도 호평받아 마땅한, 깊이 있는 인간의 상실에 관한 탐구가 이뤄진 수작이다. 각본도 톰 포드가 쓴 ‘싱글맨’은 16년간 사랑을 지속해 온 연인을 급작스레 잃고 죽음보다 못한 일상을 버티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콜린 퍼스는 사랑을 잃고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산 송장 조지를 연기했는데 소금물에 절인 듯한 표정과 걸음걸이와 자세를 유지하며 상실의 슬픔을 온몸으로 연기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콜린 퍼스의 연기에 트로피를 안겼다.


또 다른 외로움, 케니(니콜라스 홀트 분) ⓒ하준사 제공 또 다른 외로움, 케니(니콜라스 홀트 분) ⓒ하준사 제공

너무나 아름답게 스크린을 빛내는 매튜 구드, 차가운 조지와 함께 내일을 도모하고픈 찰리의 복잡한 심리를 뜨겁게 연기한 줄리안 무어, 뜻하지 않은 하룻밤으로 조지의 극단적 결행을 막아서는 제자 케니에게서 볼 수 있는 배우 니콜라스 홀트의 풋풋한 시절, 모두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다. 배우들의 호연, 이 또한 톰 포드의 연출력이다. 감독 톰 포드는 영화 마지막에 극적인 반전을 준비했다. 되돌이키려는 순간 찾아오는 운명, 인생은 목적한 대로 흘러간다는 반운명론적 말이 운명이 되는 순간. 가슴 쪼개지던 조지의 고통이 관객에게 그대로 옮아오는 결말이다.


데뷔작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의 결과 검푸른 색채를 유지한 ‘싱글맨’뿐 아니라 두 번째 연출작에서도 톰 포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엔딩을 펼쳤다. 이제 돌돌 말아두어야 하는 두루마리인데 새로 펼치는 느낌으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2017)는 끝이 난다.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스틸컷. 수진 역의 에이미 아담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스틸컷. 수진 역의 에이미 아담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야행성 동물, 불면의 밤을 보내는 수잔은 배우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했다. 호연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콜린 퍼스와의 비교에 1패를 피하지 못했다. 수잔의 전 남편이자, 영화 속 소설의 작가이자, 소설의 남자주인공 에드워드를 연기한 제이크 질렌할은 열연을 펼쳤지만 에드워드가 워낙 지질이라 멋져 보이기 힘들었다.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남우조연들이 빛났다. 에드워드가 쓴 소설에서 보안관 바비 역의 마이클 섀년, 에드워드의 아내와 딸을 겁탈한 레이 역의 애런 존슨은 ‘날 것’ 같은 연기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가장 빛난 건 각본과 제작과 연출을 맡은 톰 포드이다. 같은 감독의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싱글맨’과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전작이 침잠된 분위기 속에서,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을 ‘슬로우 슬로우, 퀵’ 느릿한 춤을 추듯 영화로 구현했다면. ‘녹터널 애니멀스’는 마치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게임’이 주는 불편한 긴장감, 불편해서 더 무서운 일상의 공포를 빠르게 연주한다. 주인공의 집 자체가 영화에 미술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은 같고, 인물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길을 끄는 것도 같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겉으로 끄집어내는 면도 같은데 그 방식이 사뭇 다르다.


자책과 상실감이 함께할 때, 에드워드의 슬픔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자책과 상실감이 함께할 때, 에드워드의 슬픔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싱글맨’에서는 짐을 잃은 조지의 상실감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직접 표현되는데,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수잔을 잃은 에드워드의 상실감이 수잔에게 배달된 에드워드의 소설을 통해 간접 표현된다. 영화 속 액자소설 속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와 딸을 잃었다고 자책하는 주인공 에드워드가 느끼는 처절한 상실감은, 영화 속 현실에서 자신의 부족함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에드워드의 깊은 상실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소설 속 에드워드의 결말이 현실에서도 그대로일까 봐 조마조마한데.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를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약속에 에드워드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수잔 앞의 의자는 비어 있다. 수잔의 상실감이 시작되는 순간인가,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는데 감독 톰 포드는 답이 없다. 전작보다 배우들의 연기는 덜하지만, 한층 깊어진 인간의 상실감에 관한 탐구에 제73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여했다.


촬영현장의 감독 톰 포드와 배우 제이크 질렌할(왼쪽부터)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촬영현장의 감독 톰 포드와 배우 제이크 질렌할(왼쪽부터)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아직 톰 포드의 감각이 담긴 안경이나 향수를 내 것으로 쓰지 못했지만, 아쉽지 않다.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를 만나는 자본의 장벽은 높지만, 감독 톰 포드를 향유하는 문턱은 낮다. 왓챠에서, 시리즈ON에서 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벨벳 재킷이나 선글라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풍성하게 톰 포드의 예술적 감성이 흠뻑 표현된 작품들, 그 감성이 태어난 톰 포드의 내면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이번 한가위 연휴에 꼭 만나 보자.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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