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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의 금융노트] 은성수 '90도 인사'의 씁쓸한 뒷맛

이충재 기자 (cj5128@empal.com)
입력 2020.06.29 08:40 수정 2020.06.29 17:10

'관치금융→정치금융' 악화하는데 금융수장은 국회에 넙죽

뒷걸음치는 국가금융경쟁력 살리려면 '정치외풍' 차단해야

은성수(왼쪽) 금융위원장이 6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해 윤관석(오른쪽) 의원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있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은성수(왼쪽) 금융위원장이 6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해 윤관석(오른쪽) 의원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있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 18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여당 의원들과 나눈 인사가 화제다. 21대 국회 정무위원들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간담회에서 은 위원장은 여당 의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금융권에서는 감독기관으로 갑(甲)의 위치에 있는 금융위지만, 국회에서는 피감기관으로 '슈퍼갑'인 의원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을(乙)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평가다.


금융당국은 이를 두고 '3차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당부하기 위한 읍소'라고 설명했다. 실제 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감안해 제3차 추경이 적시에 편성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은 위원장의 인사는 정치적 이슈와 마주한 최근 금융권의 상황과 맞물려 미묘한 해석을 낳았다. 금융당국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추경 설득'을 위해 은 위원장이 고개를 숙여야하는 쪽은 여당이 아닌, 이날 불참한 야당이다.


현재 금융권은 어느때보다 심각한 정치적 리스크와 마주하고 있다. 정치권의 입김이 금융당국의 감독‧감시 기능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하고, '정치금융'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여권 인사인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은 "관치금융은 과거보다 덜하게 된 대신 그 자리에 정치금융의 그림자가 보인다. 물론 관치금융보다 정치금융이 더 나쁘다"고 지적했고,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그동안 한국 금융을 얘기할 때 관료들이 금융기관을 흔드는 관치금융이 문제라고 얘기해왔는데 지금 더 중요한 건 정치금융의 팽배"라고 꼬집었다.


정치권에선 여당을 중심으로 "윤석열은 식물 총장", "촛불시민이 윤석열의 거취를 묻고 있다"는 등의 노골적인 사퇴압력을 쏟아내고 있다. '윤석열 검찰'이 여권 연루설이 제기된 금융사건인 라임·신라젠 비리 의혹 등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금융검찰'로 불리는 금융당국도 덩달아 숨죽이며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다.


현재 금융당국이 관리 중인 라임‧신라젠·디스커버리 등 금융사고는 향후 권력형 의혹 사건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금융당국 수장인 은성수 위원장도 윤석열 총장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정부여당의 입맛을 맞추지 못하면 임기가 보장된 고위공직자도 자리를 보존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미 금융감독원은 전례 없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감찰을 받으며 서슬 퍼런 칼날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최근 정치권력은 금융권을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천경득 청와대 총무인사팀 선임행정관은 "청와대가 금융권을 잡고 나가려면 유재수 전 국장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금융권을 잡는다"는 발언은 현재의 정치권력이 금융을 바라보는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 표현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금융권은 정치권력에 휘둘리기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주요 금융회사들의 경우, 지분이 분산된 '주인 없는 회사'인데다 당국의 관리‧감독을 받는 규제산업이다 보니 정권의 입맛에 따라 내놓는 금융상품의 성질이 달라지고 정부 정책에 동원되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민간은행에 불법 채용청탁했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정치권력이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사이 뒷걸음친 건 우리 금융 수준이었다. 세계경제포럼 조사를 근거로 한국의 금융경쟁력이 '우간다만 못하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대표적이다. 객관적이지 못한 조사 방식의 문제였지만, 지금처럼 금융이 정치에 종속된 모습만으로 따지면 우간다 보다 못하다고 해도 반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통상 '90도 인사'가 훈훈한 미담으로 퍼지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높은 직급의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했을 때 파급력이 생긴다. 예컨대 은행장이 창구직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면 미담이 되지만, 주체가 뒤바뀌면 과도한 아부성 인사로 비치거나 비굴해 보이는 장면으로 비화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은 위원장은 평소에도 주요인사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90도 인사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금융권 수장'이 정치1번지로 불리는 국회에서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금융권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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