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돈맥 기로에 서다-②] '풍요 속 빈곤' 금융자산 회색지대 잇단 경고음
입력 2020.01.02 06:00
수정 2020.01.01 20:53
만기 6개월 미만 단기 정기예금 100조 육박…길 잃은 부동자금
가구 금융자산 1억 넘었지만…'1% 금리' 안전자산에만 '뭉칫돈'
새해가 밝았지만 대한민국 경제 곳곳에는 저금리·저성장·저출산·고령화 여파로 인한 경고등이 하나씩 켜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체감 경제성장률이 1%도 안되는 실질 마이너스 금리 시대. 부동자금만 1200조로 추산될 만큼 유동성은 한껏 풀려있는데 투자할 곳이 없는 이른바 머니 그레이존(회색지대) 시대가 장기화될 조짐이다. 본지에서는 신년 기획을 통해 돈맥 기로에 서있는 대한민국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돌파구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불어난 금융자산이 시장에 제대로 돌지 못하고 표류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까지 추락하며 유동성은 한껏 커졌지만 경제적 불확실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가운데, 1% 남짓한 이자율에도 예·적금과 같은 안전자산에 돈이 쏠리는 경향은 점점 짙어지는 모습이다. 가구당 평균 금융자산이 1억원을 넘어섰지만 이를 마땅히 굴릴 곳은 없는 풍요 속 빈곤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국내 예금은행들이 보유한 만기 6개월 미만의 단기 정기예금 잔액은 99조6075억원으로 전년 말(80조9623억원)보다 23.0%(18조6452억원)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전체 정기예금 잔액이 694조156억원에서 767조4527억원으로 10.6%(73조4371억원) 정도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증가율이다.
이처럼 단기 예금에 돈이 쌓이고 있는 것은 그 만큼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자금이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경기 둔화 우려가 여전한 상황 속에서 정부의 부동산 규제와 증시 부진 등으로 인해 마땅히 자금을 운용할 만한 곳이 없게 되자, 잠시 예금에 돈을 넣어 두고 상황을 관망하는 수요가 확대되고 있다는 얘기다.
만기 6개월 미만 단기 정기예금 100조 육박…길 잃은 부동자금
실제로 금융자산 규모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가계의 사정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통계청과 한국은행이 발표한 가계금융·복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가구의 평균 금융자산은 1년 전보다 2.2% 증가한 1억570만원을 기록했고, 이 중 4분의 3에 가까운 74.5%는 저축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여윳돈이 생겨도 현실적인 대안은 역시 예·적금뿐이었다. 소득이 늘거나 여유자금이 발생 했을 때 가계의 주된 운용 방법 중 저축과 금융자산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6.8%로 절반에 육박했다. 그리고 금융 투자 시 91.5%는 예금을 선택하고 있었고, 주식과 개인연금에 이를 활용한다는 응답은 각각 4.4%, 2.5%에 그쳤다. 저축과 금융자산 투자가 아닌 여윳돈의 이용 방법으로는 부동산 구입(24.5%)이나 부채 상환(22.7%) 등이 꼽혔지만, 남는 돈이 많지 않은 서민들로서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대목이다.
김완중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제 환경의 불확실성 확대와 금리 하락, 은행들의 선제적 자금 조달로 내년에는 정기예금으로의 전반적인 자금 유입은 둔화되겠지만, 단기 예금 수신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가계는 소득 개선 제한에도 불구하고 대출 규제 강화와 주택 구입 감소, 토지 보상금 지급 등으로 잉여 자금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단기 예금이 돈이 몰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각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그 정도 규모의 자금으로는 지금 시장에서 무언가를 구매하거나 투자할 만한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라며 "부동산 말고는 딱히 대안이 보이지 않는 만큼, 부동자금 확대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가구 금융자산 1억 넘었지만…'1% 금리' 안전자산에만 '뭉칫돈'
문제는 저금리 기조가 심화하면서 은행의 예·적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자가 1%대 중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웬만한 자산이 아니고서는 사실상 별다른 금융소득을 올리기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중 신규 취급액 기준 국내 은행들의 저축성 수신 평균 금리는 1.55%로 전월(1.57%) 대비 0.02%포인트 더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 한층 짙어질 공산이 크다.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를 넘어 제로금리를 바라보는 수준까지 추가 하락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어서다. 조만간 역대 첫 0%대 기준금리를 맞이하게 될 수 있다는 전망에 국내 금융권의 긴장감은 한층 고조되고 있다.
한은은 지난해 7월 1.75%에서 1.50%로, 같은 해 10월에는 1.50%에서 1.25%로 1년 새 두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내렸다. 이로써 한은 기준금리는 2016년 6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기록했던 사상 최저치로 돌아가게 됐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올해 한은의 기준금리 추가 인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다만, 그 횟수가 한 차례일지 두 차례일지가 관심사다. 이렇게 되면 내년에 사상 처음으로 1.00%를 밑도는 한은 기준금리가 실현화할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 금융 시장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금융권에서는 지금과 같은 시장의 구조가 고착화할 경우 금융자산을 둘러싼 부익부 빈익빈의 골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가진 이들은 부동산 시장에서 쏠쏠한 수익률을 올리는 반면, 그렇지 못한 서민들은 마땅한 금융 상품을 찾지 못한 채 저금리의 부작용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염려다.
특히 최근 은행들이 판매했던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에서 불거진 투자 손실 파동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은행들이 실적에 눈이 멀어 무리한 영업에 나선 잘못이 사건의 핵심이지만, 예·적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이자를 받고자 무리한 투자에 나서는 소비자들이 많아진 것도 DLF 쇼크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논란이 된 펀드는 독일과 영국 등의 채권 금리와 연계된 DLF다. 이는 이자율이나 환율 등의 변동과 연계해 만기 지급액이 정해지는 파생상품인데, 이들 국가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금리가 예상과 달리 급락하자 약정대로 원금손실 구간에 진입한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저금리로 풍부해진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가 집값을 올리는 구조적 순환이 계속되면서 고액 자산가들은 쏠쏠한 투자 수익률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되는 반면, 일반 소비자들은 저금리 탓에 괜찮은 금융상품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이번 DLF 사태와 같이 그나마 나은 수익률을 제시하는 투자 상품에 과도한 수요가 쏠려 피해가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개연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