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차관과 비서관이 좌지우지할 것이다
입력 2017.06.03 07:28
수정 2017.10.16 10:10
<칼럼>행정부는 차관 청와대는 비서관이 주도할듯
'책임총리'의 책임과 권한은 대통령이 줘야 가능
조선시대가 ‘공자 맹자를 추종’하고, ‘선비들이 주인된 나라’라면, 이번 정부는 ‘노무현을 추종’하고, ‘86세대가 주인된 나라’라 할 수 있다. 총리, 장관과 수석비서관은 ‘얼굴마담’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대표성 있는’ 욕을 먹는 대상이 될 것이다. 주로 당과 캠프출신 전문가고 명망가다.
그 아래 실세는 ‘86세대’다. 그들은 현 정부에서 차관과 비서관을 하며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것이다. 비서실장은 그들과 대통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연배나 경륜 면에서 장관, 수석보다 부족해도 별 문제가 안 된다. 장관과 수석은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비서실장은 전달자 역할만 하면 된다. 비서실장에게 차관과 비서관은 보다 직접적인 파트너가 된다. 그들 대부분은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관 등으로 청와대에 근무했다. 그래서 친문, 친노 인사들과 ‘케미(코드)’가 맞는다.
청와대는 이낙연 총리를 ‘책임총리’라며 치켜세웠다. 대통령이 90도로 인사를 하며 떠받드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책임’만 있고 ‘권한’이 없는 허수아비 총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축제의 제물이 축제전야에 극진한 대접을 받듯, 그는 추앙받고 있다. 정부가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지고 결국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장관들을 모아 회의를 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차관급이하에서 결정되고 청와대(비서관급 이하)가 추인한 사항을 공식적으로 출납할 뿐이다.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일을 떠안아야 한다. 국회와 야당을 뛰어다니며 ‘착한 형사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각 인사청문회가 어려워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지금 총리처럼 ‘흠결’이 있는 장관들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내각에 들어오면, 그들의 권한은 더욱 제한적일 것이다. ‘책임총리’, ‘책임장관’이 아니고 ‘책임지는 총리’, ‘책임만 지는 내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특정 정파의 ‘패권주의’로 귀결될 소지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총리’가 될 수 있도록 응원하고 분위기를 만들 수 밖에 없다. ‘정부의 성공’이 ‘국민의 성공’이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정부실패의 원인이라면, 가능한 해법은 ‘책임총리’, ‘책임내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일상적인 국정은 내각에서 처리하도록 청와대가 도와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문했다. 그것이 국민의 바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총리와 내각의 권한보장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있다. 대통령의 배려가 내각 권한의 핵심적인 근거다. 과거의 정부에서 총리가 ‘얼굴마담’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다. 정권이 취약했던 DJP공동정부와 초기 노무현정부가 김종필, 이해찬총리를 실세총리로 모신 것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문재인대통령의 인기와 힘이 어느 정부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과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선의’는 별개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제도적 장치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총리는 미국의 부통령과도 다르다. 우리의 총리는 민주 절차적 허점과 그로 인한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다. 미국 부통령은 대통령과 러닝메이트로 선출되고 상원의 핵심멤버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마찰을 빚을까 극도로 조심한다. 부통령의 보좌진들도 대통령의 보좌진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를 낮추며 눈치를 본다. 하물며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는 어떻겠는가? 총리실과 내각은 대통령의 뜻을 거스를 수 없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 현실적 유혹을 대통령과 그 보좌진들이 그냥 넘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권력구조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개혁(개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낙연 총리는 ‘유능’, ‘소통’, ‘통합’을 정부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총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낙연 총리는 “현정부가 ‘정부의 무능·불통·편향에 대한 절망적 분노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촛불혁명의 도구’라고 했다. 특정세력, 특정집단의 ‘도구’가 아니라면 맞는 말이다. ‘촛불혁명’ 정신이 국민적 요구라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쓰였다면, ‘정부 도구론’은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총리나 내각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현 내각이 국민여망을 위한 도구가 될지 ‘이름뿐인 희생양’이 될지는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있다. 제발 문재인대통령이 ‘성공한 정부’를 만들어 박수 받고 퇴임하는 첫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글/김우석 미래전략개발연구소 부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