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ABC 정책…'보수만 아니면 된다?'
입력 2017.05.28 00:22
수정 2017.06.22 15:36
'적폐청산' 이름으로 보수정권 정책 뒤집기에 주력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위해 주체가 도덕적 우월해야
문재인 정부, 적폐청산 이름으로 보수정권 정책 뒤집기 주력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성공 위해선 주체가 도덕적 우월해야
24일 수요일 점심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옆에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직장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무슨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외국어는 무슨 외국어.” 아마도 직장 상사를 흉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이들이 나누고 있었던 주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얼굴은 비썩 말라가지고, 머리는 올림머리 한다고 이상한 핀을 꼽고...” 그렇다. 5~6명의 30대 젊은 샐러리맨들은 그 전날 있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번째 공판을 두고 박 전 대통령을 도마에 올린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영어사전만 본다는 보도, 그리고 재판정에서의 언론 스케치 기사 등을 소재로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분노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채 풀리지 않은 분노
이번 5․9 대선에서 심층출구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됐다. 10만 명에 달하는 단순출구조사와는 별개로 투표를 마친 3,679명을 대상으로 투표이유 등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하고 분석했다. 전체 응답자의 74.3%가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고 17.7%가 반대했다고 답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투표영향에 대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38.1%가 ‘최순실의 국정농단’, 37.5%가 ‘박 전 대통령의 불법적 국정운영’을 후보 결정의 주요 이유로 꼽았다.
실제 득표율을 봐도 그렇다. 자유한국당이 24%를 득표하는 데 그친 반면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던 정당들의 득표율의 합은 75%다. 그런데 투표가 끝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민들은 야릇한 감정의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 탄핵에 찬성했던 국민들은 불쾌한 감정에 또다시 휘말리면서 거듭 화가 난다. 탄핵에 반대했던 국민들은 이제는 잊고 싶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봐야만 하는 현실에 화가 난다.
지금의 상황이라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구속만기일인 올 10월 중순까지 그런 느낌들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최순실 게이트의 미진한 부분에 대한 재수사를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2017년 한해,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내년까지도 계속 미처 풀리지 않은 분노의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 모른다.
문재인 정부의 ABC 정책
2001년 출범한 미국 부시 정권은 전임 클린턴 정권과 항상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오죽하면 미국 언론들은 이를 ABC((Anything But Clinton)정책이라고 명명했다. 강경 보수 세력인 네오콘들이 중심이 된 부시 정부는 보다 진보적인 클린턴 정부와는 철저하게 차별화했다. 하지만 ABC정책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도 한국판 ABC 정책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정권(Conservative)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됐던 정책들을 완전히 뒤집고 있다. 대통령 업무지시의 형태를 빌어서 국정교과서 폐지, 4대강 사업 감사원 감사 지시 등 전임 정권과의 철저한 차별화에 나섰다.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앞으로 얼마나 더 진행될지 지금으로서는 미지수다.
문재인 정부는 홍준표 전 경남지사의 말대로 확실히 세련되게 국정을 운영한다. 감각적·감성적으로 사안에 접근하고 있다. 우선 취임 초 점심 식사 후 대통령과 참모들이 편안한 복장으로 커피를 들고 산책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연출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탈(脫)권위행보다.
문 대통령은 25일 첫 번째 수석 및 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계급장 떼고, 사전 결론 없이, 받아쓰기 하지 않는’ 이른바 ‘3무(無)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대통령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받아쓰기 바빠 보였던 전임 정권과 확실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전임 정권의 불통과 무능의 이미지 덕분에 지금 문재인 정부는 무슨 일을 해도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시험대에 오른 ‘고위공직자 인사배제 5원칙’
26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부실 인사검증에 대해 사과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거듭 강조해온 ‘고위공직자 인사배제 5원칙’과 관련하여 ‘선거캠페인’과 ‘국정운영이라는 현실적 무게’가 기계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면서 국민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몸을 낮추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거듭되는 인사난맥에 대해 당시 허태열 비서실장의 대국민사과문을 김행 대변인이 대독(이른바 17초 대독)했던 광경이 연상된다. 물론 임 실장이 현실적 한계를 솔직히 고백하면서 국민들의 이해를 구한 것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럴 때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해를 구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니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위장전입’ 문제는 이 후보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후보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게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 앞으로 이낙연 후보자에 대한 인준절차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내각을 꾸리는 일이 남아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후보자들이 인사청문회에 서야 한다. 위장전입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문제점이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혁명은 때로는 무력으로 상대방을 가볍게 제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혁은 법과 절차에 따라 끊임없이 상대방을 설득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저항을 눌러가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가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 그것도 상대방 즉 개혁을 당하는 쪽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우월해야 한다.
임종석 실장은 26일 “후보자가 가지고 있는 자질과 능력이 (배제 원칙) 관련 사실이 주는 사회적 상실감에 비춰 현저히 크다고 판단될 때는 관련 사실 공개와 함께 인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듣기에 따라서는 문 대통령의 ‘인사배제 5원칙’의 폐기(廢棄)선언처럼 들린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후보시절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은 지키는 것이 맞는 일이다. 예외는 정말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글 / 황태순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