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연평해전 여섯 유가족, 13년째 평택사령부에 왜?
입력 2015.06.24 08:52
수정 2015.06.24 09:02
13년째 석탄일마다 평택사령부 내 법당서 자식 추모
"우리끼리 울고 불고 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한가족"
2002 한일월드컵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을 앞둔 6월 29일 오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연평도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 684호가 남한의 고속정 ‘참수리 357’정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6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18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는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큰 희생을 치르며 NLL을 지켜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날을 한일월드컵 3·4위전과 결승전이 치러진 날로 기억한다. 당시 목숨을 걸고 NLL을 사수한 장병들과 전사한 장병들의 유가족들만 2002년 6월 29일을 연평해전의 날로 기억할 뿐이다. 데일리안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제2연평해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편집자 주 >
석가탄신일인 지난 5월 25일 평택 제2함대사령부. 제2차 연평해전을 기리는 '제2연평해전 전적비' 뒤편 전사자 6인의 음각 초상이 새겨져 있는 곳에서 '참수리 357정' 전사자 유가족들은 눈물을 훔치며 음각 초상을 연신 닦았다.
특히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정의 22포사수였던 고(故) 황도현 중사의 어머니 박공순 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몰랐다. 2002년 사건 이후 벌써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박 씨의 눈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고 있다.
"(자주 못 오는 것) 이해해라 이놈아. 잘 있지? 미안해. 이 싱거운 녀석아. 무슨 말을 하면 소리도 없이 웃기만 하니. 아유...먼지 많이 쌓여 있네."
함께 전적비 참배를 온 고(故) 윤영하 소령, 고(故) 한상국 중사, 고(故) 서후원 중사의 어머니들은 “자꾸 닦으면 닳아요. 그만해도 돼요”라는 우스개 소리를 전하며 손수건을 들고 아들의 음각 초상을 닦고 있는 박 씨의 손을 말린다.
평택 제2함대사령부 내에 전시돼 있는 참수리 357정을 찾아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윤 소령, 한 중사, 서 중사, 황 중사의 부모들은 각자 자기 자식이 쓰러진 곳을 둘러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서영석(서 중사 부친) 씨는 아들이 전사한 M-60 거치대 앞에 서서 이리저리 거치대를 만지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가족들에게 5월 25일은 6인의 전사자 가족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날이다. 이날 제2연평해전의 유가족들이 모두 모이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2003년 석가탄신일부터 올해까지 13년 동안 매년 만나며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고 있었다.
제2연평해전 유가족의 13년 인연의 시작
연평해전 이후 이들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유가족을 제외한 유가족들이 모두 불교신자라는 인연 때문이었다. 윤 소령의 부모는 무교에 가까운 기독교 신자였지만 다른 유가족들이 모두 불교신자라는 것을 알고 그들과 같은 불교식으로 장례 절차를 진행하면서 유가족들이 더욱 가까워졌다.
윤두호(윤 소령 부친) 씨는 25일 ‘데일리안’과 ‘청년이여는미래’(대표, 신보라)가 함께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건 이후 병원에 갔더니 영하보다 먼저 온 전사자들이 세명이었는데, 모두 불교식으로 차려 놓고 영하만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영하는 영국 유학시절에도 성공회 미션스쿨을 다녔고 사관학교에서도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윤 씨는 “하지만 내 경우 종교에 대해 그렇게 큰 구애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뭣하러 따로 하느냐 같이 불교식으로 하자’고 해서 모든 유가족들이 다 같이 불교식으로 장례절차를 밟은 것”이라고 말했다.
평택2함대 사령부 내부의 법당에 ‘영가대’가 설치돼 운영되기 시작한 것도 제2연평새전 당시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다. 여섯 가족 모두 불교신자라는 점, 같은 전투의 전사자들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유가족들은 사령부 내 법당에 ‘영가대’ 설치를 건의했고, 2함대사령부 법당의 법원스님이 이를 적극 추진했다. 유가족들은 십시일반으로 설치비용을 모았고, 2함대사령부의 법당을 찾는 불교신자들도 영가대 설치를 위한 헌금을 내놨다.
윤 씨는 “나가봐야 갈 곳도 없으니까 사령부 내부 법당에 계속 아이들 데리고 있어주면 안되겠냐고 요청했었다. 그러면 우리도 올 때 다 같이 한번이라도 볼 수 있어서 그랬는데 법원스님이 해줄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황덕희(윤 소령 모친) 씨도 “영가대를 우리 때문에 만들었는데 그 이후 2함대 근무자들의 돌아가신 부모님, 천안함 46명, 한주호 준위 등도 2함대 사령부 법당 옆의 영가대에 모셔져 있다”고 말했다.
"유가족끼리 모이면 울고 불고…제일 편해"
유가족들은 2002년 연평해전 이후 서로를 위로하며 또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여섯 유가족 가운데 다섯 유가족이 연평해전 이후 거처를 옮길 정도로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하지만 유가족들끼리 모이면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고, 또 욕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석가탄신일 외에도 입춘, 동지, 호국보훈의 달 등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나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
“어떻게 여섯 가족이 이렇게 돈독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편하니까, 우리끼리 울고불고 할 수 있으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박공순(황 중사 모친) 씨는 “(연평해전 이후) 웃는 것도 여기서 웃기 편하고 세상 돌아가는 불평도 여기서 하는게 제일 편하다”라면서 “여기계신 분들은 모두 다 똑같은 입장이다. 최근에는 유가족분들 모두 나이가 좀 드셨으니까, 그냥 오래들 사셨으면 좋겠다”고 흐느꼈다.
윤 씨도 “외출하면 말도 함부로 못하고 타인이 나를 알아보는 것도 불편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내외를 다 아니까 2005년에 이사를 갔다”면서 “괜히 우리를 피하는 것 같고 우리를 보고 수군거리는것 같고 그런 불편을 느꼈다”고 말했다.
서영석 (서후원 중사 부친) 씨는 “연평해전 이후 나한테 몇 천만원 대에서 억대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들이 접근했다. 보상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었다”면서 “결국 대인 기피증이 생겼다. 지나가는 길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만 있어도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얘기에 우리는 큰 상처를 받아왔다”고 하소연했다.
서 씨는 “연평해전 이후 남들 앞에서 이를 드러내보인 적이 없었다. 자책감 때문”이라면서 “웃으면 ‘자식 앞세워 놓고 뭐가 그리 좋아서 웃고 있나’ 이런 욕을 들어 먹을까봐 모두들 서러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끼리 이렇게 앉으면 웃고, 울고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13년이 지나갔다”고 말했다.
"영화 ‘연평해전’은 기대 반, 걱정 반"
아울러 24일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에 대해서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연평해전의 의미를 다시 새기기 위해 영화가 흥행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자식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영화를 통해 다시 봐야 한다는 ‘아픔’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서 씨는 “영화에 영결식 장면이 나온다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면 좋을 것 같다”고 눈시울을 훔쳤다.
윤 씨는 “김 감독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는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말했었다”면서 “이런 영화를 통해 나라를 위해 산화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을 새겨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있는 영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박 씨는 “가족의 입장에서 내 아들이 당시 어떻게 싸웠을까, 그 부분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간접적으로 다시 보게되는 것인데 이 부분이 제일 두렵다”면서 “다시 상처가 날까 두렵다”고 말했다.
황 씨도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있겠지만 엄마된 입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볼지 걱정이다”라면서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들만 우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