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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침 삼킬 선물, 우리 정부만 모른다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4.06.14 09:42
수정 2014.06.14 10:08

<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척계광 6기 정조가 18기로 보존

시 주석 방한때 시연후 돌려준다면 중국인들 열광할텐데

2014년 4월 28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카스(喀什)지구 내 공안국 산하 파출소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경찰봉을 보고 “왜구(倭寇) 격퇴에 업적을 세운 명(明)의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떠올랐다”면서 "5명이나 7명씩 대나무 창을 이용해 왜구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뒤에,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 격살했다“고 하였다. 시진핑 주석이 일본의 기를 꺾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내비친 사건이라 하겠다.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임진왜란

명대(明代) 해상무역 봉쇄로 인해 명과 조선의 해안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었다. 척계광은 지금의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조선의 이순신만큼이나 중국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사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중국에선 만력위국조선전쟁(萬曆爲國朝鮮戰爭)이라 부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무비(武備)를 소홀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선조(宣祖)가 한성(漢城)을 버리고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서야 겨우 명(明)의 구원군을 맞게 된다.

1953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선조가 제독영에 직접 찾아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지난 전투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이겼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자 이여송이 대답하길 “앞서 온 북장(北將) 조승훈(祖承訓)은 여진족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전쟁에 불리하였으나 지금 제가 와서 사용한 병법은 곧 왜적을 방어했던 척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했기 때문에 전승(全勝)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은 기마병인데 비해 남방 왜구들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전술이 달랐던 거다. 이여송 제독은 척계광(1528∼1588)의 무예와 전술로 훈련된 남방의 절강군(浙江軍)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가 '기효신서'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이여송이 군사비밀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선조는 역관(譯官)에게 몰래 영(令)을 내려 이여송 휘하를 매수하여 그 비급을 구한다. 그리고는 유성룡(柳成龍)에게 책을 보이며 해독하게 했으나 군사(軍事)를 모르는 그도 알 길이 없었다. 하여 토론을 거듭한 끝에 병법과 무학에 밝았던 유생(儒生) 한교(韓嶠)를 추천 받는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해독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여송 휘하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의리가 있어 유성룡에게 “우리 명군이 돌아가면 조선이 홀로 어찌 지키겠소? 그러니 명군이 돌아가기 전에 기회를 봐서 군사 조련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권한다. 이에 유성룡이 서둘러 한교를 낭관(郎官)으로 삼고 70명의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낙상지 휘하 병사 10명을 교관으로 삼아 밤낮으로 창(槍), 검(劍), 낭선(狼筅)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이들이 조선군에 척법(戚法)을 가르쳐 왜적들과 싸웠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군은 척계광의 사(射, 궁수), 포(砲, 총포수), 감(砍, 창검수)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배우고, 1595년에는 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 호대수(胡大受)에게서 직접 삼수군(三手軍)이 훈련을 받는다. 한교 역시 유격장군 허국위(許國威)에게 창법(槍法), 패법(牌法), 선법(筅法) 등을 물어 척계광의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를 따로 모아 책으로 편찬하니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武藝書) 《무예제보(武藝諸譜)》다.

명(明)의 국기(國技)가 조선의 국기로

이렇게 해서 척계광의 무예가 임진왜란 중에 조선군에 전해지게 되었다. '기효신서'에는 사법(射法)을 비롯해 창(槍), 당파(鏜鈀), 낭선(狼筅), 등패(籐牌), 곤(棍), 권법(拳法)이 실려 있는데 중국 병장무예서로는 유일하게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온다. 그리고 이 책에는 왜구가 떨어뜨리고 간 수첩에 기록된 검법(長刀)까지 참고로 실어놓았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쌍수도(쌍수도)란 이름으로 체계화했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후금(後金)이 북방에서 발기하자 그에 대비하여 권법(拳法), 월도(月刀), 협도곤(挾刀棍), 왜검(倭劍)으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펴냈으며,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에 항복하게 된다. 이후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을 준비하다 요절해버렸으나 조선 조정은 독자적으로 북방의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해 긴 병장기(兵仗器)를 다루는 기예를 꾸준히 개발해 나갔다.

숙종(肅宗) 때에는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이 사신을 따라 왜(倭)에 건너가 검보(劍譜)를 구해와 왜검(倭劍)과 교전(交戰)으로 체계화하였다. 영조(英祖) 때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섭정(攝政)할 때 그동안 정립된 무예 18가지와 기예(騎藝) 4가지를 완성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펴낸다. 조선의 국기 ‘십팔기(十八技)’란 이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십팔기는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鏜鈀), 낭선(狼筅),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월도(月刀), 협도(挾刀), 등패(籐牌), 권법(拳法), 곤봉(棍棒), 편곤(鞭棍)을 다루는 18가지 기예라는 뜻으로 무예십팔반(武藝十八般)이라고도 불렸다.

EBS '영상무예도보통지'에서 척계광의 원앙진으로 왜구를 격살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원들. ©데일리안

200여 년에 걸쳐 완성한 나라에서 만든 나라의 무예 ‘십팔기(十八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는 이 모든 과정을 한권의 통지로 펴내게 하니 그게 바로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고대종합병장무예서 십팔기 교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이덕무 박제가가 정조의 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2백여 년에 걸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후 조선에선 군사를 훈련시킴은 물론 무과(武科) 시험과목이었다.

십팔기에는 신라 황창랑(黃昌郞) 고사가 그 연기(緣起)가 되는 본국검(本國劍)을 비롯한 한국 전래 무예 9기, 중국 척계광의 6기, 일본 검법 3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말 위에서도 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예도(銳刀)는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중국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를 통해 되찾은 고대 검법이다. 모원의는 그 사연을 밝히고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후 모든 중국 검법의 모태가 되었다.

위 내용은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것을 그대로 필자가 옮긴 것이다. 전 세계에는 온갖 무술(武術)이 전하지만 국가에서 만든 군사무예로서 남은 것은 십팔기가 유일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한반도에서 동양3국이 대규모 국제전을 치른 결과로 남은 것으로 ‘동양무예의 정화’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 역사를 통틀어 동양3국 문화를 우리가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정립한 것은 무예십팔기가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어느 국가든 망하게 되면 그 왕조를 지키던 무기체계와 무예도 함께 말살시키거나 멸실되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십팔기 이외에 세계 어디에도 고대군사무예가 남아있지 않다. 당연히 중국에도 현재 척계광의 '기효신서' 책만 전해질 뿐 무예 실기는 멸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재 소림사 등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중국무술은 모두 민간에서 전해지는 호신술이다.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대종합병장무예 십팔기

물론 한국도 구한말(舊韓末) 갑오경장 때 구식군대(舊式軍隊)가 해산되면서 십팔기가 사라지고 그 대신 일제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군(軍), 관(官), 경(警), 학교에 유도와 검도가 무도(武道) 과목으로 채택되고 시중에서는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가라테(空手道)가 수입되었다. 가라테는 1955년에 태수도(跆手道)로, 1965년에 태권도(跆拳道)로 개명을 거쳐 한국화, 스포츠화했다.

요행히 십팔기는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의 계보로 그 실기가 간신히 전해져 지금은 (사)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가 전승보급하고 있다. 아무렴 이토록 귀중한 세계의 문화유산인 십팔기의 실기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음은 기적적인 일이라 하겠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은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알고 있는데 참고로 중국에는 ‘십팔기’란 용어가 없다. 대신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란 용어가 '수호지'(水滸誌)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후 중국에서는 각기 다른 18가지의 무기를 나열하는 용어로서 사용되었다. 게다가 문헌마다 그 종류도 일정치 않다.

원앙진(鴛鴦陣)으로 왜구를 격살하다

이번에 시진핑 주석이 언급한 척계광의 격법(擊法)은 낭선, 등패, 장창, 당파를 익힌 12명의 병사들이 한 조를 이루어 2열로 진을 짜서 왜구를 척살하던 진법(陣法)으로 원앙진(鴛鴦陣)이라 부른다. 낭선은 대나무 끝에 창을 꽂고 가지마다 날카로운 철편(鐵片)들을 달아 독을 묻혀 장도(長刀)를 든 왜구의 접근을 방해하고, 그 좌우에 표창(鏢槍)과 등패, 그리고 요도(腰刀)로 무장한 등패수가 공격과 방어를 하면 뒤에 있던 장창수와 당파수가 그 틈새를 뛰쳐나가 적을 찌르는 법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은 역사상 중국이 일본과 벌인 첫 전쟁이며 승리한 전쟁이다. 더구나 명조(明朝)연합군이 왜적을 물리친 전쟁으로 4백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중일 간의 과거사 및 영토분쟁의 갈등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그 과정에 동양 3국의 군사무예 정수가 조선의 국기가 되어 고스란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끊임없이 서로 주고받기를 거듭하면서 소멸, 변질, 창조되어가는 것이 문화의 속성. 아무렴 지난날 공자묘(孔子墓)에 제사지내는 법을 잃어버렸던 중국이 한국에 남아있는 제례법을 가져간 적이 있다. 또 얼마 전 한국전쟁 중 전몰한 중국군 유해를 돌려주었다. 또 2014년 5월 29일 중국측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항일공조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을 세워주었다.

문화를 이용한 은유적이면서도 강력한 메시지

만약 중국인들이 그토록 추앙하는 척계광의 무예6기의 원형이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 놀라고 반가워할 것이다. 해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 때 척계광의 무예 시연을 본다면 자신이 한 역사적 언급을 한국이 실증해 보이게 되는 것이니 더 없이 기꺼운 일이 되겠다. 그리고 이참에 그 기예까지 중국에 되돌려준다면 또 하나의 기쁜 선물이 될 것이다. 진정한 문화교류란 이런 것이다.

더불어 멀리는 420여 년 전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가까이는 '안중근기념관'과 '광복군 제2지대표지석' 건립해준 데 대한 답례가 되는 것은 물론 과거사 문제 등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본 아베정권에 대한 무언의 경고가 된다. 나아가 중국이 한 번 더 남북통일에 힘써줄 것을 부탁하는 은유적 메시지도 되겠다. 두 정상이 만나 거친 말로 일본을 성토하는 것보다 훨씬 품위 있고 무겁다. 이런 게 역사와 문화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는 창조적 솔루션이다.

황금을 무색케 만든 무쇠

2013년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그 해 10월부터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에 전시하기로 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비롯한 3점에 대해 반출을 불허했다가 한바탕 소란을 치른 끝에 반가사유상은 예정대로 나갔었다. 그리고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은 성황리에 끝났다고 한다.

헌데 재미있는 일은 정작 뉴욕 시민들을 열광시킨 건 황금불상도 황금관도 아니었다. 반가사유상 반출소동 때문에 얼떨결에 덤으로 따라 나간 철불(鐵佛)이었다.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상을 빼닮은 철조여래좌상으로 아직 국보나 보물로 지정받지도 못했다.

원래의 금칠이 벗겨져나간 1.5m 크기의 철불이 뿜어내는 장엄미에 관객들이 압도당한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찬밥 신세였던 이 철불상이 단 한 번의 외출로 일약 글로벌 스타,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존(至尊)이 되어 돌아왔다. 말 그대로 황금을 무색케 만든 고철이다.

소국(小國)적 시야를 버려야 문화융성 가능

이를 보건데 우리가 과연 문화를 제대로 아는 민족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 김치와 막걸리를 일본인들이 알아주니까 그제야 반색을 하더니, 이번에는 금은동도 아닌 값싼(?) 철불을 대국(大國)인들이 알아주니까 졸지에 야단법석이다. 아무렴 제나라 국기가 십팔기인줄, 그것도 세계 유일의 보물인줄도 모르는 민족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제 나라 찬란한 문화만을 무작정 소중히 여기고 자랑한다고 문화민족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문화의 참된 가치를 알아야 진정한 문화민족이겠다. 백남준이 한국에 있었으면 고물장수밖에 안 되었을 거라는 농담도 있다. 황금이 귀해서일까, 흔해서일까? 올림픽에서도 금메달만 쳐주는 민족이다.

통일신라 철제여래좌상이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건너가지 못했더라면 때로는 쇠나 돌이 황금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영영 깨닫지 못했을 것 같다. 아무튼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도 글로벌 안목이 필요함을 일깨워준 사건 아닌 사건이었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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