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연평해전, 김정일 사전계획해 직접 지시
입력 2012.06.1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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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수뇌부 "우발적 도발"이라는 정부 발표 뒤집는 증언 잇따라
"북, 14자로 구성된 SI 정보에는 당시 쏠 무기까지 언급돼 있었다"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연평해전은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해군사령부가 최고 수준의 보안유지 아래 공작 차원에서 벌인 해전이었다는 주장이 당시 군 수뇌부 인사들로부터 제기됐다.
이는 애초 국방부가 북한 경비정의 우발적 단독행위라고 발표했던 것과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제2 연평해전 발발 10년을 맞아 정부의 책임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와 함께 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 두 차례나 우리 대북감청부대가 ‘발포’라는 용어가 포함된 북한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음에도 상부에 묵살됐다는 주장을 당시 감청부대장이 증언하고 나섰다.
2002년 6월 29일, 한일 월드컵축구 3·4위전 경기가 있던 날 오전 10시 25분쯤 연평도 서쪽 해상 NLL(북방한계선)상에서 북한 경비정의 기습사격이 시작됐다.
당시 적의 기습공격을 받자 제2함대 사령관은 보복응징 사격에 나섰다. 초계함의 76㎜ 함포 50여발을 쏘아서 적의 경비정을 반 정도 침몰시켰다. 이제 50여발만 더 쏘면 침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던 순간 갑자기 상급부대에서 사격중지 지시가 내려와 사격이 중지된다.
지난 2010년 6월 29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정부주관행사로 열린 제8주년 제2연평해전 기념식에 참석한 시민들과 학생, 군인들이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교전당시 총탄 자국이 선명한 참수리호를 관람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우리 고속정 1척이 침몰하고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는 대참사를 일으킨 제2 연평해전에 대해 당시 정부는 ‘우발적으로 북한 경비정이 단독으로 벌인 도발’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연평해전 10년을 맞은 지금 당시 군 수뇌부 출신 인사들이 정부의 발표를 뒤집는 증언들을 속속 내놓고 있어 주목된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 북한이 계획적인 도발을 일으킨 이유는 결국 ‘서해NLL 무효화’에 있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성만 전 해군작전사령관은 “김정일은 2002년 5월 1일 해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구성원들을 일일이 격려해가며 도발을 준비했다. 제1·2 연평해전의 기획과 준비, 실행, 사후점검에는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 구성원들이 참여했다”며 “연평해전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해 도발한 사실상의 해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실은 지난 2006년 이미 밝혀졌다”면서 “(김정일이) 교전이 끝난 후에도 ‘사실상 북한이 이긴 전투’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고, 책임을 물어 경질했다고 발표한 서해함대 8전대장은 1년 뒤 복직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했다.
이어 김 전 해군작전사령관은 “당시 남북 관계가 경색된 것도 아니었고, 한국의 대북지원과 정상회담 추진 등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일 때 북한이 무력 도발한 것을 보면 북한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 두 차례나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용어가 사용된 ‘SI(Special Intelligence·특수 정보)’를 감청한 정보가 보고됐으나 군 수뇌부가 이를 묵살했다는 증언이 당시 대북감청부대장으로부터 제기됐다.
한철용 전 5679부대장은 “그해 6월 13일 대북감청부대는 북한 해군의 8전대 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의 교신 내용 중에 우리 고속정을 목표로 ‘발포’라는 결정적 용어가 포함된 정보를 감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14자로 구성된 SI 정보에는 당시 쏠 무기까지 언급돼 있었다”며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우리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던 우리 군 당포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되고 승무원 39명이 전사한 사건을 연상케 하는 정보였다”고 말했다.
이는 앞서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의 증언과 같은 것으로 최 총장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제2 연평해전을 앞두고 우리 군 당국이 13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발포 명령만 내리면 바로 발포하겠다’는 등 북한의 도발 징후를 감청한 상황에서도 군 수뇌부는 ‘월드컵 기간 중 (대북) 긴장 관리를 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전 부대장은 “국방부가 도발 정보를 묵살하지 않았더라면 100% 막을 수 있었고, 설령 기습을 받았더라도 ‘확전을 우려해’ 보복응징 사격을 도중에 중지해 패배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북한 경비정을 침몰시켰더라면 북한은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도발은 감히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2 연평해전은 우리 정부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 발발했다. 2002년 4월 3~6일 통일부장관을 대표로 하는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우리 대표단은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국방장관회담 개최, 개성공단 건설, 남북철도·도로 연결 등을 요구했으며 김정일도 대부분 이에 합의했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357정은 85㎜포탄 5발, 37㎜포탄 19발, 14.5㎜ 기관총 234발 등 총 258발을 맞았다. 당시 우리 고속정이 적함의 1000야드(914㎜)까지 접근한 이유는 잘못된 NLL 교전규칙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교전규칙에서 한국군은 북한이 먼저 공격하면 그때부터 자위권 행사가 가능할 뿐으로 당시 우리 함정은 근거리 밀어내기인 차단기동으로 북한 함정을 NLL 북방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전 부대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6.15선언과 함께 귀국 일성이 ‘한반도에 이제 전쟁은 없다’였다. 하지만 2년만에 해전이 발생했고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는데도 3일간의 장례기간도 못 참아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킨 조치가 과연 온당한 것이었는지 지금이라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데일리안 = 김소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