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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률 높은데도 MB 정부에 경제불만 왜?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1.03.0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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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스쿨>경제대통령은 선거과정의 구호 당선이후엔 버렸어야

문제해결 위주 실적주의 일정한 방향성 갖지못해 좌충우돌할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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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6월 22일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경선후보가 충남 아산시에서 열린 시도경선선대위 발대식에서 강연을 통해 경제대통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월 25일 이명박 정부는 출범 3주년을 맞았다.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교차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부정적이다. ‘경제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더욱 부정적이다. 모경제신문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2011년 2월 25일자)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가장 잘못한 부분이 경제문제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경제지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렇게 인색한 평가를 내릴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모범적으로 그리고 조기에 극복한 국가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울 G20’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 같은 평가에 힘입은 바 크다. 2010년에는 6.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2002년 이래 최고의 성장률인 것이다.

‘경제대통령 실적주의’의 뿌리는 실용주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인색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스스로 ‘경제대통령´을 자임한 것도 그 중 한 요인이다. ‘경제대통령’을 자임한 것은 치명적 패착이 아닐 수 없다. 경제대통령은 ‘경제대통령론(論)’으로 선거과정에서의 구호(campaign)로만 의미를 가져야 한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경제대통령론’을 버렸어야 했다. 경제운영에는 왕도(王道)가 없음을 밝히고, 자신이 솔선하고 국민에게 땀과 눈물을 요구했어야 했다.

‘경제대통령’은 ‘실용주의’와 닿아 있다. 실용주의는 “원칙은 아무래도 좋으니, 실적만 올리면 된다”는 ‘실적주의’로 변용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적주의’는 상황논리에 따른 ‘기회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을 자임함으로써 스스로를 ‘실적주의’에 가두었다. 경제문제에서 이해관계는 늘 교차하고 있다. 한 문제의 해결은 다른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문제해결 위주의 실적주의는 일정한 방향성을 갖지 못해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의 대표적 정책아이콘이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특별한 이유 없이 이를 버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친(親)기업 정책’을 의미한다. 영어로 표기했다는 것은 우리말로 표기하기가 불편했음을 시사한다. 친기업 정책에는 기업을 구슬려 ‘747공약’을 추진하려 했던, 즉 ‘한 건’을 올리려는 ‘실적주의’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CEO로서의 ‘경제대통령’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다. “친기업, 친서민” 같이 특정 계층에 대한 ‘친(親)’은 여타 계층에 대한 ‘반(反)’을 시사하므로, ‘반시장적’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비즈니스 프렌들리’ 대신 ‘마켓 프렌들리’ 또는 ‘친시장’처럼 원칙이 선 경제정책을 수립했어야 했다.

‘친기업’에서 ‘친서민’으로 정책을 급선회한 것도 정반대의 시각에서 ‘실적’을 쫒았기 때문이다. 친서민은 서민에게 다가가 ‘정권의 지지도’라는 ‘또 다른 한 건’을 건지려 한 것이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경제대통령’이 되려한 것이다. 서민의 삶이 나아지면, 지지도는 저절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국정 지지도는 쫓는 대상이 아닌 결과적 보상인 것이다.

‘공정사회론’은 ‘철학 부재’란 비판을 일거에 잠재우기 위한 MB정부의 ‘회심의’ 반격카드이다. ‘공정사회론’은 헛돌고 있다. 치열한 문제 제기와 성찰과정을 생략하고, ‘공정사회론’을 ‘화두’로 던졌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정사회는 좌파개념이다. ‘회심의 반격’을 위해 이념지형을 넘나든 것이다.

공정사회론도 ‘실적주의’가 빚은 산물인 것이다. 처음부터 ‘기회균등’ ‘약자에 대한 배려’ ‘공직자에 대한 높은 도덕성 요구’ 보다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쏟아내는 통로로 이용될 위험이 높았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차라리 책임사회, 신뢰사회를 화두로 던졌어야 했다. 정의와 도덕이 통치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자유가 도덕의 본질인 것이다.

‘소통부재’ 라는 굴레를 자초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부재’는 숙명과도 같은 굴레이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이대통령의 소통부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소통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화합도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통부재’는 이명박 대통령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다. 소통부재는 정치적 ‘절충과 타협’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야권의 전략인 것이다. MB정부는 속절없이 말려든 것이다.

우리는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수상이 소통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정책과 이념 그리고 가치를 국민과 소통했다. 소통은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분명한 지향점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제노선을 국민들에게 차분하게 설득해 나갔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과 가치에서 일관된 지향점이 없으니 소통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는 국민과 “소통할 그 무엇이” 없었던 것이다. ‘경제대통령’이라는 허상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원칙’을 바로 세워야

국민들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적 성과’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 이유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린 대북문제와 대비시킬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햇볕 정책´이란 유화정책을 과감하게 버리고 ‘비핵화(非核化)와 상호주의’ 원칙을 지켰다. 전임 대통령들이 많은 돈과 원조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바치면서 정상회담을 얻어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손을 벌린 북한 정권이 한국보다 도덕적 권위와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햇볕 정책´의 기저에는 ‘긴장완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비겁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는 상징이 이를 웅변한다. ‘돈을 주고 산 평화’는 ‘실용주의’에 비견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문제에 있어 일정한 성과를 내고 이를 국민들이 인정해 준 것은, ‘비핵화와 상호주의’ 대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즉 ‘실용주의’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CEO 대통령으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경제대통령’으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친기업, 친서민, 중도, 실용, 공정사회론 등 모든 것을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국민의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쌓은 국정지지도는 ‘전세대란’이란 쓰나미에 힘없이 무너졌다. 이명박 정부가 초심에서 벗어난 것은 인기를 쫒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원칙’을 바로 세우고 이를 밀고 나가면 절반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원칙은 크게 2가지로 압축된다. 친기업, 친서민이 아닌 ‘친시장’의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의 시장개입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지담론에 휘둘리지 말고 미래세대를 위해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것이다. ‘경제대통령의 힘은 유한하다. 원칙을 바로 세울 때,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이 존중되고 시장에 활력이 고취될 것이다. 경제를 살리는 것은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경제주체의 몫이지, 경제대통령의 몫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스스로를 과적(過積)해 왔다. ‘경제대통령’의 자임은 패착이었다.

글/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하이에크 소사이어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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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 하이에크소사이어티의 ´자유경제스쿨´(http://www.freemarketschool.org)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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