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문학상 ‘장르’ 경계를 허물어뜨린 캐나다 작가 앤 카슨 수상
입력 2026.10.08 22:00
수정 2026.10.08 22:00
2026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작가 앤 카슨. 2015년 스톡홀름의 한 행사에 참여했을 때의 모습이다. ⓒ AFP/연합뉴스
2026년 노벨 문학상은 시와 산문, 신화와 현실 등 경계를 허물어뜨린 캐나다 작가 앤 카슨(76)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8일(현지시간)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고전 전통과 유희적으로 대화하며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카슨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123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19번째 여성 수상자다. 캐나다 작가로는 2013년 수상한 소설가 앨리스 먼로 이후 두번째다.
한림원은 “평생 동안 시 창작과 번역, 강의를 병행해온 그녀의 문학 작품 대부분이 언어학자의 단어에 대한 집착과 시인의 새로운 의미에 대한 열망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며 “카슨 자신도 모든 작품의 출발점이 단어의 어원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고 소개했다.
195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카슨은 작가이자 고전학자다. 시와 소설, 에세이, 번역, 학술 논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글쓰기로 유명하다. 신화와 그리스 문학, 세계고전 작품을 인용하고 재해석하고 현대화하며 ‘번역으로의 문학’, 시·산문·비평·소설·논픽션 등을 넘나드는 통섭적 문학 활동을 이어왔다. 맥아더 펠로십과 구겐하임 펠로십 등을 받았고, 2001년에는 여성 최초의 T S 엘리엇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카슨의 문학은 신화와 현실, 시와 산문의 경계를 무람없이 넘나들어 쉽사리 규정하기 어렵다. 시라고 하기에는 산문적이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형식이 지나치게 자유롭다. 에세이와 비평, 번역과 희곡까지 한 작품 안에서 버무려진다. 단순히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애초에 그 경계가 왜 필요한지를 반문한다.
그의 작품세계를 떠받치는 큰 축은 고대 그리스 문학과 신화다. 고전학자인 카슨에게 신화는 낡아빠진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과 욕망, 질투와 배신, 상실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 응축된 교과서다. 그는 그리스 비극과 신화 속 인물들을 오늘의 시간으로 불러내 현대인의 고독과 욕망을 비춘다.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은 이런 특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괴물 게리온을 내성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현대의 퀴어 청년으로 다시 빚어낸다. 신화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던 괴물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옮겨오면서 영웅과 괴물이라는 오래된 구도 역시 뒤집힌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문 ‘운문소설’이라는 형식은 내용 못지않게 카슨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그가 간단없이 파고드는 또 다른 주제는 사랑과 욕망이다. 카슨에게 사랑은 충족보다 결핍에 가깝다. 누군가를 욕망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깨닫고, 그 결핍 때문에 더 깊이 상대를 원하게 된다. 해서 작품에서 사랑은 황홀과 고통, 친밀함과 고독을 함께 보듬는다. 초기작 ‘에로스, 달콤쌉싸름한’부터 이어진 이 문제의식은 카슨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한다.
죽음과 기억을 다루는 방식도 남다르다. 카슨은 동생의 죽음을 소재로 한 ‘녹스’에서 시와 산문, 사진과 편지, 번역과 사전적 기록을 한데 엮었다. 상실을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하지 않고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그대로 내보인다. 기억이란 완전히 복원될 수 없고 애도 역시 끝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책의 형식 자체로 보여주는 셈이다.
카슨의 힘은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오래된 신화와 철학을 끌어와 오늘의 감정을 비추는 동시에 문학의 형식 자체를 간단없이 뒤흔든다. 그의 작품 안에서 시와 산문, 학문과 감정, 과거와 현재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태어난다.
ⓒ 자료: 노벨위원회/연합뉴스
결국 카슨이 묻는 것은 오래됐지만 결코 낡지 않은 것들이다. 인간은 왜 사랑하고, 왜 상처받으며, 떠난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 경험을 문학은 어떤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가. 그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문법을 깨뜨리고 질문을 낯설게 만든다. 바로 그 낯섦 속에서 카슨의 문학은 고전과 현대, 지성과 감정이 맞부딪치는 독특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국내 소개된 작품으로 ‘빨강의 자서전’을 비롯해 ‘짧은 이야기들’, ‘플레인워터’, ‘에로스, 달콤씁쓸한’, ‘남편의 아름다움’, ‘플로트’, ‘녹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등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상금 12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6억원)와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올해 노벨상은 앞으로 9일 평화상, 12일 경제학상이 각각 발표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