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라인을 협상장에 올린 대가 [기자수첩-산업]
입력 2026.05.27 07:00
수정 2026.05.27 07:00
일단은 총파업 유보지만...내부 결속·시장 신뢰 흔들
영업익 연동 성과급, 성과주의 아닌 '배급주의' 지적도
노사 모두 '라인 멈추지 않은 이후'의 설득 과제 남아
ⓒ데일리안AI 이미지
삼성전자 총파업은 일단 유보됐다. 노사는 파업 돌입 직전 잠정합의안을 도출했고, 조합원 찬반투표도 마감을 앞두고 있다. 최악의 생산 차질은 피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파업이 멈췄다고 해서 이번 협상의 비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반도체 생산라인이 실제로 멈추지는 않았지만, 멈출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협상의 가장 강한 지렛대로 쓰인 순간부터 삼성전자는 이미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성과 보상 요구 자체가 아니었다. "멈출 수 있다"는 힘이 협상의 중심에 놓인 순간이었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두고 노사가 치열하게 다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생산라인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실상 가장 강한 협상 카드로 작동하면, 외부의 시선은 달라진다. 그것은 더 나은 보상 체계를 만들기 위한 설득이라기보다, 모두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을 협상장에 올려놓은 장면으로 비칠 수 있다.
협상은 본래 기브앤테이크다. 쌍방이 접점을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임금과 성과급을 놓고 회사와 협상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실적이 좋아졌다면 성과를 만든 구성원에게 일정 부분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문제는 그 요구가 회사 전체의 지속 가능성, 다른 사업부 구성원, 주주와 협력사 등 다른 이해관계자의 부담을 얼마나 함께 고려했느냐다.
성과급은 요구할 수 있다. 임금도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멈추면 모두가 손해를 본다"는 사실이 요구를 관철하는 지렛대가 되는 순간, 협상은 설득보다 압박에 가까워진다. 안타까운 것은 그 방식이 가장 빠르게 통했다는 점이다. 멈춤의 비용이 클수록 회사는 양보할 수밖에 없고, 그 장면은 다시 다음 협상의 기준이 된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노조는 반도체 부문 성과를 보다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배분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성과급 산식이 불투명했다면 고쳐야 한다. 성과를 낸 조직에 더 큰 보상이 돌아가는 것도 성과주의의 기본이다. 다만 기업 실적이 좋아졌다고 회사의 영업이익을 특정 집단이 우선 나눠 가질 몫처럼 인식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과 보상과 회사 이익에 대한 권리 의식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번 사태가 더 불편하게 읽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과주의의 언어를 쓰면서도 어느 순간 배분주의의 문법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성과급은 성과를 낸 사람과 조직에 대한 보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을 먼저 떼어 공동 재원처럼 설정하고, 이를 부문별·사업부별로 나누는 방식이 전면에 오면 논의의 중심은 '누가 어떤 성과를 냈느냐'가 아니라 '벌어들인 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로 옮겨간다. 성과급이란 이름은 남았지만, 논의의 문법은 보상보다 배분에 가까워진 셈이다.
회사의 성과는 여러 주체의 결과물이다. 생산라인을 지킨 직원들의 공이 있고, 연구개발과 품질, 영업, 지원 조직의 기여도 있다. 동시에 막대한 설비투자와 연구개발비를 감당한 회사의 판단이 있고, 손실 위험을 부담한 주주 자본도 있다. 협력사의 납기와 고객사의 신뢰도 기업 성과를 떠받치는 기반이다. 반도체와 같이 사이클이 큰 업종에서는 호황기에 벌어들인 이익이 다음 불황을 버티는 투자 재원이 되기도 한다. 영업이익은 성과급의 원천일 수 있지만, 곧바로 나눠 가질 현금봉투는 아니다.
근로자는 회사 성과를 만드는 핵심 주체지만, 회사 이익의 최종 처분 권한을 가진 동업자는 아니다. 근로 제공의 대가와 성과에 따른 보상은 당연히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회사가 벌어들인 영업이익 자체를 공동 지분처럼 보고 일정 비율을 먼저 떼어 나누자는 요구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성과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곧 이익 처분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산라인을 협상장에 올린 대가는 이미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폰, TV, 가전, 네트워크, 시스템반도체까지 품은 국내 유일무이한 초대형 '종합전자회사'다. 이번 임금협상은 사실상 DS, 그중에서도 메모리 성과급을 중심으로 흘렀다. 그 순간 DX와 비메모리 직원들에게 합의안은 회사 전체의 약속이 아니라 특정 부문의 성과 배분안처럼 비쳤다.
노조 내부 대표성 논란도 남았다. 노조는 근로자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근로자의 이해가 같지 않을 때, 노조 안에서도 다수와 소수가 생긴다. DS 조합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서 DX 중심 노조가 찬반투표 절차를 문제 삼고 법원 문을 두드린 장면은 상징적이다. 사측을 상대로 한 교섭은 성과를 냈지만, 그 과정에서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충분히 담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았다.
인재와 조직문화 측면의 후유증도 가볍지 않다. 사내외에서는 이번 합의안을 두고 "몇 년간 성과급을 바짝 땡긴 뒤 경쟁사로 옮기려는 계산까지 나오는 것 아니냐"는 냉소도 나온다. 실제 이직 규모나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말이 도는 것 자체가 삼성전자에는 부담이다. 성과급은 인재를 붙잡는 장치여야 한다. 그러나 보상 체계가 조직 전체의 장기 경쟁력보다 특정 시점의 보상 극대화 논리로 읽히는 순간, 성과급은 결속의 수단이 아니라 이직 계산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시장과 주주의 불신도 대가 중 하나다. 영업이익 연동형 성과급은 호황기에는 성과 공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주주 입장에서는 투자와 배당, 자사주 매입, 미래 설비투자에 쓰여야 할 재원이 노사합의로 먼저 배정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손실 위험을 감내하는 것도 주주다. 한 주주는 "회사가 어렵다고 급여가 깎이진 않지만, 주식은 빠진다"고 이번 사태를 비판했다. 성과를 만든 사람의 권리만큼, 자본을 댄 사람의 권리도 기업 안에서는 무시할 수 없다는 취지다.
사회적 피로감도 커졌다. 수억원대 성과급 가능성이 거론되는 순간, 이 논쟁은 전통적인 노동권 투쟁과 결이 달라진다. 연간 6억원은 연봉 3000만원 근로자의 20년치 임금에 해당한다. 물론 고성과 조직에 더 큰 보상이 돌아가는 것은 성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 요구가 국가 핵심 산업의 생산라인 중단 가능성과 결합하면, 국민 여론이 연대보다 피로감과 거리감을 먼저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삼성전자 노사의 잠정합의안은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그 대가는 아직 계산 중이다. 내부적으로는 DS와 DX의 골이 깊어졌고, 노조 간 대표성 다툼은 법정으로 갔다. 외부에서는 주주들이 영업이익 배분 권한을 문제 삼기 시작했고, 재계는 성과급 요구가 다른 사업장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여기에 인재 유출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이번 합의는 파업을 막은 문서인 동시에 새로운 숙제를 남긴 문서가 됐다.
이번 합의가 진짜 타결로 남으려면, '라인이 멈추지 않았다'는 결과만으로는 부족하다. 회사는 보상 체계가 내부 형평성과 장기 투자 여력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노조는 성과 보상 요구가 특정 부문만의 몫 챙기기로 비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주주와 시장도 납득할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 생산라인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협상의 핵심 카드로 올려놓은 대가는 이미 삼성 안팎에서 청구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