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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조 낸 삼성도, 중견기업도 '사투'…26년 멈춘 상속세 시계

백서원 기자 (sw100@dailian.co.kr)
입력 2026.04.06 12:36
수정 2026.04.06 12:36

삼성가(家) 5년 만에 12조 완납 ‘뉴삼성’ 속도

33년 흑자 ‘청호나이스’는 세금에 가업 포기

“OECD 최고 수준 실효세율 60%, 자본 족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1월 28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제139기 해군·해병대 사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명예관장과 함께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이날 이 회장 아들 이지호 씨가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뉴시스

삼성 오너 일가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산에 대한 12조원 규모의 상속세를 이달 마지막 분납으로 모두 청산한다. 단일 기업 집단으로는 전례 없는 거액을 5년간의 사투 끝에 완납하며 경영권 수성에 성공했지만, 제조 생태계를 받치는 중견기업들은 상속세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가업을 포기하고 있다.

대기업도 세금 사투…중견기업은 매각 행렬

6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유족은 이달 마지막 상속세 분납금을 납부하며 5년에 걸친 연부연납 절차를 마무리한다. 이건희 선대회장이 2020년 별세 당시 남긴 약 26조원 규모의 유산에 대해 산정된 상속세 12조원을 모두 치르는 것이다. 홍라희 명예관장이 3조1000억원으로 부담이 가장 컸고 이재용 회장(2조9000억원), 이부진 사장(2조6000억원), 이서현 사장(2조4000억원) 순이다.


재원 확보를 위해 홍 명예관장과 두 사장은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 지분을 단계적으로 매각했다. 반면 이재용 회장은 핵심 지분을 매각하지 않고 배당금과 개인 신용대출 등으로 2조9000억원의 재원을 마련하며 삼성물산을 정점으로 한 지배구조를 수성했다. 그 결과 이 회장의 삼성물산 지분은 17.48%에서 22.01%로, 삼성생명 지분은 0.06%에서 10.44%로 확대됐다.


상속세 완납과 함께 지난해 사법 리스크까지 털어낸 이 회장은 ‘뉴삼성’ 청사진 공개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그간 세금 마련에 쏟았던 에너지는 차세대 반도체(HBM4)와 바이오 인수·합병(M&A) 및 미래 투자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호텔신라 지분 약 1% 매입 계획을 밝힌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의 독립 경영 기반 다지기 등 계열 분리 논의도 본격화될 수 있다.


이 같은 상속세 압박은 삼성만의 고충이 아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역시 로봇 계열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이다. 업계는 정 회장이 보유 지분 22%를 통해 확보할 약 6조원 규모의 실탄이 향후 지배구조 재편과 상속세 재원 등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이 지배구조 재편으로 버티는 사이, 자금 동원력이 부족한 중견기업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33년 연속 흑자를 기록한 생활가전 전문기업 청호나이스는 최근 약 3000억 원의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미국계 사모펀드(PEF) 칼라일과 경영권 매각 협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주 별세 후 유족이 가업 승계 대신 매각을 택한 것이다. 앞서 락앤락과 한샘, 쓰리세븐 등 강소기업들도 같은 이유로 주인이 바뀌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승계 부담으로 제3자 매각을 고려하는 중소·중견기업은 국내에만 약 21만 개에 달한다. 30년 넘게 공들여 키운 제조 기반이 세금 압박에 해체되는 일이 일상이 된 셈이다.


지난달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6 스마트공장·자동화산업전(AW2026)에서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양산형 모델이 일반을 대상으로 공개되고 있다.ⓒ데일리안 홍금표 기자
"입법 지연 속 제도 유연성 확보 시급"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 50%(최대주주 할증 시 60%)는 2000년 이후 26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이는 일본(55%), 프랑스(45%), 미국·영국(40%) 등 주요 선진국을 크게 웃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지난해 최고 세율을 40%로 낮추는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부자 감세’ 비판에 막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입법 속도는 더딘 반면, 최근 주가 상승으로 잠재적 상속세 부담이 커진 일부 그룹은 과세 기반을 조정하려는 유인이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세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으로 전통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제약을 받으면서 승계 일정 앞당기기나 지배구조 단순화 작업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박세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정부 개편안에는 최대주주 할증 폐지나 세율 인하가 빠져 있고, 일괄공제·배우자공제 상향과 일부 제도 정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서 “단기간에 상속세 구조가 크게 바뀔 가능성은 낮지만, 이 때문에 개편 지연이 오히려 기업 지배구조 변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속세가 기업의 미래 투자를 가로막는 ‘자본 족쇄’가 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경영권과 경제적 이익을 분리해 승계할 수 있는 제도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백영찬 상상인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원활한 가업 승계를 통해 기업 지배구조의 안정화와 적극적인 신사업 투자, 차별화된 R&D 전략 등이 가능하다”며 “미국 가업승계의 특징은 ‘기업지배권’과 ‘경제적이익권’을 분리해서 설계했다는 점인데, 쉽게 말해 기업경영자와 자산승계자를 구분해 상속·증여가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서원 기자 (sw100@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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