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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쏠림에 2인1역 쪼개기…한국형 ‘멀티캐스팅’의 현주소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2.06 11:02
수정 2026.02.06 11:02

'안나 카레니나' 측 "캐스팅·회차는 크리에이터 고유 권한"

'서편제' 측 "20대 송화-노년 송화 페어 캐스팅은 제작적 선택"

국내 뮤지컬 시장은 ‘멀티캐스팅’(Multi-Casting)이 보편화됐다. 주연 배우 한 명이 장기 공연을 책임지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와 달리, 한국은 한 배역에 2명에서 혹은 4~5명의 배우를 캐스팅해 번갈아 무대에 올리는 식이다.


제작사 입장에서 본래 이 제도는 배우의 체력 안배를 통해 최상의 공연 컨디션을 유지하고, 관객에게는 다양한 해석의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혀준다는 명분으로 도입됐다. 이 측면에선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안나 역을 맡은 (왼쪽부터) 배우 옥주현, 김소향, 이지혜 ⓒ마스트인터내셔널

그런데 공연계 일각에서는 이 제도가 본래의 취지와 달리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정 배우에게 회차가 집중되거나 배역 나누기가 시도되면서, 멀티캐스팅이 스타 마케팅이나 제작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와 ‘서편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타이틀롤인 안나 역의 스케줄 배분을 두고 잡음이 일었다. 통상 멀티 캐스팅의 경우 회차를 비슷하게 나누는 것이 관례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옥주현에게 전체 회차의 60% 이상이 배정됐다. 실제 총 38회차의 공연 중에서 옥주현의 출연 회차는 23회에 달한다. 반면 김소향은 7회, 이지혜는 8회에 불과하다. 더구나 김소향은 7회 공연 중 5회가 낮 공연에 배정되어 있다.


남자 주인공인 알렉세이 브론스키 역의 윤형렬과 문유강, 정승원의 회차가 각각 11회, 11회, 16회로 비교적 고르게 분배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사실상 단독 주연에 가까운 비중으로, 같은 배역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의 균형이 깨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멀티캐스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만 실제 운영은 특정 스타 배우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다양성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긴 대목이다.


뮤지컬 ‘서편제’는 배역 운영 방식에서 새로운 논란을 불렀다. 제작사는 송화 역에 이자람, 차지연, 이봄소리와 함께 걸그룹 스테이씨 멤버 시은을 추가 캐스팅했다. 눈여겨볼 점은 배역의 소화 범위다. 다른 배우들이 송화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전 생애를 연기하는 것과 달리, 시은은 젊은 시절만 연기하고 노년의 송화는 소리꾼 정은혜가 이어받는 형식을 취했다. 일각에서는 아이돌 출신 배우의 노래, 연기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변칙 캐스팅’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각 제작사는 공식 입장을 통해 캐스팅의 배경을 설명했다. ‘안나 카레니나’ 제작사 마스트엔터테인먼트는 “캐스팅과 회차는 제작사와 오리지널 크리에이터들의 고유 권한”이라며 “라이선서와의 협의, 총 공연 회차 축소, 배우들의 스케줄 등 변수들이 많아 어렵게 정리된 스케줄”이라고 밝혔다.


‘서편제’의 제작사 PAGE1은 ‘20대 송화-노년 송화’ 페어 캐스팅 방식에 대해 “단순한 캐스팅 추가가 아니라 송화의 후반 생애가 지닌 깊이와 피날레의 정서를 더욱 또렷하게 전달하려는 제작적 선택”이라며 “2026년부터 더 열린 방식으로 ‘서편제’의 캐스팅 지형을 확장하고, 젊고 가능성 있는 배우들이 작품에 보다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구성의 폭을 넓히는 방향을 모색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서편제' 젊은 송화 역으로 뮤지컬 데뷔를 앞둔 스테이씨 시은(왼쪽), 시은과 페어를 이뤄 노년의 송화를 연기할 소리꾼 정은혜(오른쪽). ⓒPAGE1

제작사 설명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아쉬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모양새다.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 제작사가 이 같은 스케줄을 강행했다면, 사실상 특정 배우의 컨디션을 고려하지 않고 티켓 파워에만 기댄 결과가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함께 캐스팅된 배우들에 대한 배려와 예우도 실종됐다.


‘서편제’ 경우 새로운 얼굴에게 기회를 준다는 시도 자체에는 박수를 주고 싶지만, 그렇다면 오롯이 그 배우를 해당 캐릭터로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구나 ‘서편제’ 송화는 캐릭터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장하면서 가져가는 서사가 작품의 핵심이다. 서사의 호흡을 끊어가면서까지 특정 회차, 특정 구간만 연기하게 하는 것이 과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연출적 허용’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스타 배우의 티켓 파워에 의존하는 제작 환경 속에서 캐스팅의 균형이 무너질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관객이 기대하는 무대 퀄리티는 안정적인 캐스팅과 배우들의 고른 역량에서 나온다. 특정 배우에게 쏠린 회차 편성이나 무리한 배역 나누기가 반복된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저해하고 관객의 신뢰를 낮추는 요인이 된다.


멀티캐스팅은 배우와 제작사, 관객 모두에게 ‘윈윈’을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효율성이 스타 마케팅을 위한 도구로만 해석될 때 제도의 취지는 퇴색된다. 그렇지 않아도 공연계에 작품보다 스타 배우 의존도가 높다는 지적이 팽배한 현 상황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변칙’보다는, 작품의 본질, 관객의 기대와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제작사의 책임 있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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