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구할 구원투수가 왔다…열일곱 단종의 마지막 곁을 지킨 사람들, ‘왕과 사는 남자’ [D:현장]
입력 2026.01.21 18:13
수정 2026.01.21 18:13
권력의 정점에서 유배지로 내몰린 왕, 그리고 그 곁에 머문 사람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삶을 통해 역사 너머 인간의 얼굴을 비춘다.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메가박스에서는 장항준 감독, 배우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김민이 참석한 가운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언론배급시사회 및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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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택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그곳에 머물게 된 어린 선왕의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조선 제6대 왕 단종 이홍위는 열두 살에 즉위했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유배된 끝에 열일곱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영화는 단종의 삶을 중심 서사로 풀어낸 한국 영화 최초의 시도다.
장항준 감독은 "작품을 준비하기 전부터 역사 자문해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어디까지 진짜고, 어디까지만 기록이 남아있는지, 수많은 단종의 죽음에 대한 설이 있는데, 그 중 우리는 어디에서 취해야하고, 어떻게 이어야하는지에 상상력이 많이 필요했다"라며 "엄흥도라는 분에 대해 실록에는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라는 분이 슬퍼하며 곡하고 시신을 수습했고, 숨어 살았다'는 두 줄정도로 짧게 나와있다. 이 부분을 극적인 장치로 기록의 행간에 있는 것들을 고심해 그렸다"라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들며 고민한 부분을 밝혔다.
유해진은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광천골 촌장 엄흥도를, 박지훈은 단종 이홍위를 연기했다. 유지태는 당대 최고 권력자 한명회로 분했으며 전미도는 이홍위의 곁을 지키는 궁녀 매화 역을 맡았다. 김민이 엄흥도의 아들 태산으로 합류했다.
장항준 감독은 "유해진 씨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캐스팅을 염두에 드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드렸더니 하고 싶다고 말씀해 주셔서 쾌자를 불렀다. 박지훈은 '약한 영웅'이라는 드라마를 보라고 해서 봤는데 단종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는 오히려 박지훈이 지금처럼 팬덤이 엄청나진 않았다. 배우로 이미지가 뚜렷하게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캐스팅하고 나서 글로벌 스타가 되어서 제가 너무 기분 좋았다"라고 유해진과 박지훈을 캐스팅한 이유를 말했다.
이어 "두 분 연기하는 걸 보셔서 느끼셨겠지만 다른 분들 상상이 안됐다. 거의 합숙일 정도로 있었는데, 현장에서도 두 분이 부자관계 같았다. 아끼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지냈다. 두 분이 그런 좋은 태도로 계셔서 당연히 영화에도 반영이 된 것 같다"라고 유해진, 박지 연기에 만족감을 보였다.
유지태에 대해서는 한명회에 대한 기존 이미지부터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장 감독은 "기존 작품 속 한명회는 왜소하고 날카로운 인물로 그려졌지만, 사료를 살펴보니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수려했으며 무예에도 능했다'는 기록이 있더라"며 "세조를 왕위에 올린 인물이 그렇게 가벼웠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무게감 있는 배우로 유지태를 떠올렸고, 새로운 한명회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캐스팅을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전미도와 관련해서는 단종을 모셨던 여섯 명의 궁녀를 하나의 인물로 압축해 매화라는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장 감독은 "처음에는 출연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만남이 성사되며 상상이 확장됐고 그에 따라 역할의 비중도 자연스럽게 커졌다"라고 말했다. 김민의 경우 이번 작품이 세 번째 호흡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내비치며 "볼 때마다 다양한 얼굴과 가능성을 지닌 배우"라며 "데뷔 때부터 함께해 온 만큼 오래 정이 쌓인 배우"라고 평가했다.
박지훈은 단종을 표현하는 데 있어 특정 감정이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기보다,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데 집중했다며 "유배지에 홀로 남아 매화와 마주 앉아 있는 상황 자체에 스며들며 감정을 쌓아갔다.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기보다, 단종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는 상태가 가장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유해진 역시 별도의 준비나 특정 포인트를 설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해진은 "어디 중점을 두고 준비한 건 없었다. 시나리오에 적힌 글자와 막연하게 상상했던 슬픔이나 정 같은 것들이 현장에서 사람의 온기로 스며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가에서 단종이 물장난을 치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 시선을 보면서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박지훈은 유해진과의 연기 호흡을 묻는 질문에 "촬영뿐 아니라 촬영 외의 시간까지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것들이 화면에 담긴 것 같다. 선배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호흡했을 뿐, 표현을 의식하며 다가가진 않았다"라고 유해진을 향한 신뢰를 표했다.
유해진은 웃음과 눈물의 진폭이 깊어진 이유로 장항준 감독과 박지훈의 영향을 꼽았다. 그는 "장항준 감독은 굉장히 유쾌하고 열려 있는 분이다. 제 의견을 잘 들어주고, 수정이 필요할 때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준다. 세세한 감정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이야기해주는 스타일이라 그런 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기는 결국 주고받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극 안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인물이 박지훈이었다. 정말 좋은 공을 던져줬다"고 덧붙였다.
특히 후반부 장면을 떠올리며 "쓰러졌다가 안내를 받아 들어가 이홍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그 눈의 깊이를 보는 순간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걸 느꼈다. 부탁을 하거나 감정을 주고받을 때도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중간에 쑥스럽게 울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감정이 흘러나왔다"고 설명했다.
박지훈 역시 같은 장면을 언급하며 "저도 그 순간 감정이 터졌던 것 같다. 뒤에서 앉아 눈물을 훔치며 보고 있었다. 영화 속 이홍위가 엄홍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아버지를 보는 듯한 슬픔이자 보고 싶은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며 "선배님과 눈을 마주쳤을 때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라고 회상했다.
유지태는 한명회 캐릭터를 두고 "이 영화에서 한명회는 척추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는 "'왕과 사는 남자'에서 한명회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인물을 제대로 그려내야 영화 전체가 바로 선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당시를 떠올리며 "감독님이 기존에 그려진 한명회와는 다른, 힘이 있는 새로운 한명회를 그리고 싶다고 하셨다. 그것이 새로운 변신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촌마을 사람들과 분리된 위치에 있는 인물인 만큼, 직관적으로도 한명회가 담당해야 할 역할이 분명했다"며 "연기 톤과 영화 속에서 내가 서야 할 지점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연구했다"고 전했다.
장 감독은 관객이 영화에서 느끼길 바라는 지점으로 '정의에 대한 질문'을 꼽았다. 그는 "후반 작업을 하면서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계속 생각했다"며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성공한 역모는 박수받고 실패한 정의는 잊혀져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단종을 끝까지 지킨 충신들의 선택을 보며 관객 각자가 무언가를 느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장항준 감독은 "관객 수를 말하는 건 조심스럽다. 모두의 바람은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하길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침체된 시기인 만큼, 우리 영화가 올해 한국영화의 재도약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한다"라고 바랐다. 2월 4일 개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