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중남미서 헤게모니 쟁탈전
입력 2026.01.11 07:45
수정 2026.01.11 07:45
美, ‘돈로 독트린’ 앞세워 ‘앞마당’ 중남미 주도권 쟁탈에 나서
자국이익 극대화 위해 가치·규범보다 ‘힘’ 통해 질서재편 시도
中, ‘중남미와 운명 공동체’ 구상 담은 對미국 견제 문건 공개
親美정권 들어서면 베네수엘라에 대한 투자사업 타격 불가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일 미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위치한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군의 군사작전 단행 뒤 마코 루비오(왼쪽) 국무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오른쪽) 전쟁부 장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이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지역을 놓고 헤게모니(hegemony·패권) 쟁탈전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돈로(Don-roe) 독트린’(트럼프식 먼로주의)을 거론하며 서반구(남북아메리카 지칭) 패권을 강조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압송하는 무력 행사를 통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 진출을 추진하자, 대규모 투자를 발판으로 이곳 진출의 기회를 엿보던 중국이 정면 비판하며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를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일 보도했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을 통해 서반구 패권 회복을 선언하자마자 중국도 9년 만에 "중국은 중남미와 함께 호흡하고 운명을 같이 한다"며 중남미와의 운명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담은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정책 문건’을 공개하며 강력히 견제에 나선 것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을 겨냥해 “중국과 중남미관계는 제3자를 겨냥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제약받지도 않는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의 정책구상이 중남미에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미국을 제치고 중남미 지역에서 최강자가 되겠다는 것이 중국의 목표라는 설명이다.
미 정부는 앞서 지난달 5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먼로 독트린'(1823년 미국의 서반구 리더십 확립 정책)을 잇는, 먼로 독트린을 재해석한 '트럼프 코롤러리'(Trump Corollary)를 내걸고 서반구를 미국 국가안보의 최우선 순위로 올렸다. 코롤러리는 ‘필연적 결과’라는 의미로, 기존의 원칙을 재확인하되 그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일종의 업그레이드를 뜻한다. '돈로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서반구를 미국의 ‘앞마당’으로 규정하고 관리하겠다는 전략인데, 가치나 규범보다 힘과 이익을 기준으로 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군사 작전을 통해 서반구에서 역외 세력의 영향력 확대를 더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트럼프 정부가 국경장벽 설치와 불법체류자 대거 추방을 앞세운 초강경 이민 정책과 함께 베네수엘라 등 역내 마약 카르텔 단속을 위한 군사 작전을 펼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 정부는 이를 위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고 있다. WSJ에 따르면 백악관은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PDVSA)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계획의 핵심은 PDVSA가 생산하는 원유의 대부분을 미국이 확보해 직접 판매·유통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통해 국제유가를 배럴당 50달러 선까지 낮추겠다는 ‘야심찬 구상’을 참모들에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특수부대 델타포스에 의해 체포돼 미국으로 압송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난 5일 미 뉴욕에서 헬기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AP/뉴시스
이 구상이 실현될 경우 미국은 자국 내 생산량과 베네수엘라 등 해외 진출 기업들의 물량을 합쳐 서반구 석유 매장량의 대부분을 관리하게 된다.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은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무기한 판매할 것"이라며 "판매 수익금은 당분간 미국이 통제하는 은행 계좌로 입금된 뒤 추후 베네수엘라 과도 당국에 배분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베네수엘라 내 중국 영향력 배제’, ‘미국 소비자를 위한 에너지 가격 인하’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중국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10일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정책 문건’을 발표한 데 이어 이번 베네수엘라 사태 등 중남미의 각종 현안과 관련해 미국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목격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5일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일방적이고 패권적 행태가 심각한 충격을 주고 있다”며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을 에둘러 비판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세계는 혼란과 변화가 교차하고 있다”며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 국민이 자주적으로 선택한 발전의 길을 존중하고, 국제법과 유엔(UN)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지켜야 하며, 특히 대국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날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 회의에서 푸충(傅聰) 유엔 주재 중국대사는 "미국의 일방적이고 불법적이며 패권적인 행위에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어떤 국가도 세계의 경찰로 행동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은) 중남이의 평화와 안정을 공동으로 수호할 준비가 돼 있다“고 부연했다.
지난달 19일에는 중국 관영 중국중앙(中國中央)TV(CCTV)를 통해 중미에서의 전투 시뮬레이션을 다룬 중국인민해방군 워게임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릴랜드 라자루스 미 플로리다국제대 잭 고든 공공정책연구소 부소장은 “단기적으로 중국이 서반구 군사 행동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중국의 야망은 경제적 목표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중국을 방문한 니콜라스 마두로(오른쪽)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2023년 9월13일 수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식에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중국이 베네수엘라를 공격한 미국을 향해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은 대(對)베네수엘라 투자 피해가 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도 베네수엘라가 수출하는 원유의 80%가량 사들이며 경제협력을 지속해왔다. 트럼프 1기 정부 때인 2019년 미국이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을 제재했지만, 중국은 이른바 ‘그림자 선단’을 활용해 원유 수입을 지속했다. 그림자 선단은 국제 제재를 피해 원유 등의 불법 수송에 관여하는 선박 집단을 가리킨다.
특히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중남미 거점인 베네수엘라에 석유개발 및 통신사업과 관련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왔다. 미국 주도로 베네수엘라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 지금까지 공들여온 투자 사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와 에너지 컨설팅 업체 우드맥킨지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산 원유 확보량이 가장 많은 외국 기업은 중국 국유기업인 중국석화(中國石化·SINOPEC)다. 중국석화가 확보한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2억 8000만 배럴에 달한다. 러시아의 로스네프트가 2억 3000만 배럴로 다음이고 국유기업 중국석유(中國石油·CNPC) 1억 6000만 배럴, 미국 셰브론이 9000만 배럴로 그 뒤를 이었다.
중국석화는 베네수엘라 PDVSA와 유전개발 등 장기 협력계약을 체결하고 베네수엘라 내 최대 유전지역인 오리노코벨트 등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중국석유도 2008년 현지 합작사인 시노벤사를 세워 오리노코벨트에서 초중질유를 생산 중이다. 민영 기업인 중국 CCRC도 2024년 PDVSA와 계약을 맺고 마라카이보 지역 유전 2곳에서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기업연구소(AEI)는 2016~2023년 중국 기업의 베네수엘라 유전 투자액은 모두 21억 달러(약 3조원)로 추산했다.
ⓒ 자료: 유라시아그룹 등
금융 지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콜롬비아 싱크탱크 안드레스 벨로 재단이 2023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중국이 중남미 각국에 제공한 차관 규모는 모두 1360억 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620억 달러 정도가 베네수엘라에 집중됐다. 중국이 석유를 담보로 한 차관 구조를 통해 에너지 확보와 동시에 베네수엘라 재정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통신시장에서도 중국 기업들은 맹활약하고 있다. 화웨이(華爲)와 중싱(中興)통신(ZTE)가 주요 통신장비 공급업체로 자리잡고 있다. 화웨이는 2004년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2억 5000만 달러 규모 광섬유 인프라스트럭처 개선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친미 성향 정권이 들어서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
마두로 정권 당시 중국 기업에 부여한 우대조건을 철회하거나 계약 자체를 재검토할 공산이 큰 탓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베네수엘라 석유 유통과 금융거래에 관여한 중국 본토 기업은 물론 홍콩 기업까지 제재대상으로 포함시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우회 거래와 결제에 홍콩 기업들이 활용돼 왔다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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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