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컬처, 유행의 파도를 넘어 ‘인프라’가 되다 – 2025년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김희선의 글로벌 K컬처 이야기⑩]
입력 2025.12.26 14:00
수정 2025.12.26 14:00
연말이 되면 저는 유독 창밖을 오래 보게 됩니다. 빠르게 흘러간 한 해의 장면들이 유리창에 겹쳐지듯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성수동의 과밀한 동선,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긴 대기 줄, 한강변 편의점 앞의 북적임, 남산에 이어 인왕산과 북한산까지 가득 메운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2025년은 그렇게, 서로 다른 장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 해였습니다. 올해 비로소 K-컬처가 더 이상 유행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일상과 산업 속에 스며든 글로벌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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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이었습니다. 공개 직후 전 세계 시청 시간 5억 시간을 넘기며 '오징어 게임' 의 기록을 경신한 이 작품은 콘텐츠의 성취를 넘어 실제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한 한국의 골목, 간식 문화, 전통 복식과 기물에 매료된 시청자들이 실제로 한국을 찾기 시작했고, 2025년은 ‘한국 여행의 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한 해로 기록되었습니다. 가상의 서사가 실물 경제와 관광, 도시 경험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K-콘텐츠가 지닌 파급력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삼성동의 한 치킨집에서 치맥을 즐기고, 무대 위에서 페이커의 이름을 연호하던 순간 또한 올해의 기록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술 산업의 정점에 서 있는 글로벌 리더가 한국의 일상과 팬덤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기화된 이 장면은, K-컬처가 더 이상 특정 세대나 장르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악, 게임, 음식, 팬덤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문화 생태계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보다 더 직관적으로 설명할 장면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장 품격 있는 장면으로는 올해 가을의 경주를 떠올리게 됩니다. 천년 고도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한국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AI와 반도체, 미래 산업을 논의하는 회의장 밖에서는 경주의 미식과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대비는 오히려 한국이라는 나라의 서사를 또렷하게 만들었습니다. 혁신과 전통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국가, 이제 한국은 그런 위치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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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들이 겹치며 하나의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올해의 K-컬처는 더 이상 하나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콘텐츠는 여행이 되고, 여행은 소비와 체험으로 이어졌으며, 그 경험은 다시 새로운 이야기의 배경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문화가 다음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호출하는 흐름이 곳곳에서 관찰되었습니다. 2025년은 K-컬처가 감상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드디어 도시와 산업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온 해였습니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이라는 브랜드의 위치 또한 분명해졌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흥미로운 나라나 트렌디한 목적지로만 소비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고, 함께 기획할 수 있으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문화가 산업의 장식이 아니라, 설계의 주체로 자리 잡았고, K-컬처는 이제 그 흐름의 중심에서 현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올 한 해 함께 이 변화의 순간들을 지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낸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상상력이 되었고, 우리의 문화가 누군가의 도시와 산업 안으로 들어간 한 해였습니다. 2026년에는 이 문화적 성취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작동하는 기준과 감각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장면은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으니까요.
올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해에도 더 단단하고 섬세한 현장의 이야기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