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한마디에…KDDX, 전력화 지연·소송·'승자의 저주'까지 떠안았다
입력 2025.12.23 16:00
수정 2025.12.23 16:34
대통령 발언 이후 수의계약서 경쟁입찰로 선회…해군 전력화 시계 더 늦춰져
HD현대·한화오션 '승자독식'…보안감점 최대 변수, 법적 분쟁 가능성도
이지스함 실적 vs 감점 리스크…출혈경쟁땐 '승자의 저주' 빠질수도
한국형 차기 구축함 조감도(KDDX) ⓒHD현대중공업
2년 가까이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이 결국 ‘지명경쟁입찰’로 방향을 틀었다. 장기간 논란 끝에 추진 방식은 정리됐지만 사업자 선정이 내년 말로 넘어가면서 전력화 일정이 최소 2년가량 늦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놓고 다시 한 번 정면 경쟁에 돌입한다.
방위사업청은 전날(22일)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를 열고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자 선정 방식으로 수의계약, 경쟁입찰, 공동설계 등 3개 안을 상정해 논의한 끝에 만장일치로 경쟁입찰을 의결했다.
방사청이 선택한 경쟁입찰은 방산업체만 참여할 수 있는 ‘지명경쟁’ 방식이다. 지난 2월 산업통상자원부가 KDDX 건조 방산업체로 지정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입찰에 참여해 제안서를 제출하고, 평가를 거쳐 한 곳이 상세설계와 선도함(1번함) 건조를 맡게 된다.
KDDX는 2030년까지 7조8000억원을 투입해 6000톤(t)급 ‘미니 이지스함’ 6척을 국내 기술로 확보하는 해군 주력 전력 사업이다. 함정 건조는 통상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후속함 건조 순으로 진행된다. KDDX는 한화오션의 전신인 대우조선해양이 개념설계를, HD현대중공업이 기본설계를 각각 수행했다. 그간 함정 사업에서는 기본설계를 맡은 업체가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수의계약으로 이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기본설계는 2023년 12월 완료됐지만 이후 사업자 선정 방식을 둘러싸고 업체와 정부, 방추위 민간위원들의 견해가 엇갈리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화오션이 HD현대중공업의 군사기밀 유출 사건을 근거로 경쟁입찰을 요구하며 맞서면서 갈등은 장기화했다.
방사청은 최근까지도 기술 연속성과 납기 관리 측면에서 기본설계를 수행한 HD현대중공업과 수의계약을 맺는 방안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검토해 왔다. 해군이 운용 중인 광개토대왕급 구축함(DDH-I) 3척 등 최소 6척이 2028~2032년 퇴역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전력 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공개 발언이 기류를 크게 바꿨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충남 천안 타운홀 미팅에서 “군사기밀을 빼돌려 처벌받은 곳에 수의계약을 주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관련 사안을 언급했다. 특정 기업명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과거 군사기밀 유출로 보안 감점을 받은 HD현대중공업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수의계약 논의는 사실상 동력을 잃었다.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전경. ⓒ한화오션
경쟁입찰로 갈아탄 만큼 전력화 일정은 더 늦어진다. 방사청은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기본계획을 다시 작성해 내년 1분기 방추위에 상정한 뒤 제안요청서 작성, 입찰공고, 제안서 평가, 협상 절차를 거쳐 내년 말까지 계약을 마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일정대로 가더라도 선도함의 해군 인도 시점은 2032년 말로 잡혔다. 당초 2030년 말에서 2031년 무렵으로 거론되던 일정이 최소 1~2년 더 밀리는 셈이다.
향후 최대 쟁점은 보안감점 적용 여부다. 평가 점수 차가 크지 않을 경우 보안감점이 당락을 가를 수 있다. 방사청 군함 입찰은 통상 가격과 기술 평가를 합산해 승패가 소수점 차이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HD현대중공업은 과거 군사기밀 유출 사건과 관련해 1.8점의 보안 감점을 받았고, 방사청은 이달 19일까지 적용됐던 추가 보안 감점(1.2점)을 1년 더 연장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감점 적용 결정에 따라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감점을 고려하면 한화오션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결과를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HD현대중공업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신예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급과 정조대왕급의 기본설계를 주관한 국내 유일의 조선사로, 해군 이지스 구축함 6척 가운데 5척을 건조했다. KDDX가 탄도미사일 탐지·추적과 방공 임무를 복합 수행하는 함정이라는 점에서 대형 이지스 구축함 건조 경험이 평가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미 사업이 상당 기간 지연된 상황에서 경쟁입찰이 저가 경쟁으로 흐를 경우 ‘승자의 저주’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수주 이후 건조 과정에서 비용 상승과 책임 공방이 뒤따를 수 있고 협력업체 단가 조정 부담도 커질 수 있어서다. 특히 한화오션은 기본설계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함정 상세설계 기간을 맞추는 데 부담이 더 클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절차가 다시 지연될 경우 2028년 이후 시작될 구축함 퇴역 일정과 맞물려 전력 공백 논란이 커질 수 있다”며 “이제는 방사청의 일정 관리와 분쟁 억제 장치가 실제로 작동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