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도시', 지창욱이 완성한 장르의 농도 [D:인터뷰]
입력 2025.12.15 11:13
수정 2025.12.15 11:13
데뷔 이후 액션과 드라마를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확장해온 지창욱은 '조각도시'에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증명했다. '힐러', '더 케이투', '최악의 악', '강남 비-사이드'로 쌓아온 액션 감각에 섬세한 감정 연기를 더해, 완전히 추락한 한 인물의 붕괴와 복수를 설득력 있게 끌어냈다.
억울한 누명으로 삶이 산산이 부서진 태중의 여정을 중심에서 이끌며 교도소·오토바이·카체이싱 등 난도가 높은 시퀀스를 캐릭터의 정서와 자연스럽게 맞물리게 했고, 미스터리한 요한과의 긴장감 있는 대립 구도에서도 흔들림 없는 축을 세우며 작품의 서스펜스를 끝까지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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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욱에게 '조각도시'는 10년 전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조작된 도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작품이었다. 당시 흥행을 기록한 영화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CJ ENM이 초기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서사를 확장했고, 원작 각본을 맡았던 오상호 작가가 시리즈 대본을 집필하며 그 결을 그대로 이어갔다.
12부작으로 넓어진 호흡은 인물의 내면과 몰락을 한층 세밀하게 담아낼 수 있는 무대가 됐다. 그러면서 지창욱에게는 세계관의 확장에 그치지 않고 10년의 시간 동안 성장한 자신을 어떻게 다시 이 세계에 스며들게 할지 고민해야 했다.
"처음 시리즈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 시대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대본을 보니까 너무 재미있었고, '이건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10년 전과는 다른 모습의 제가 어떻게 녹아들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부담이 동시에 있었어요."
누명을 뒤집어쓰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남자의 서사는 장르물에서 익숙한 구조다. '조각도시' 역시 그 틀에서 출발한다.
"태중은 억울함을 안고 완전히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인물이잖아요. 그 감정을 시청자가 따라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첫 과제였어요. 힘을 주기보다는 현실적인 톤으로 가려고 했고, 분장·조명·의상·촬영과 많이 맞춰가며 상태 변화를 쌓아갔습니다. 상투적 구조가 될 위험이 있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부분이에요. 피폐한 분장이나 조명 톤, 수염 같은 시각적 요소가 감정을 받쳐주고, 저는 그 분위기 속에서 태중의 깊이를 만들어갔죠."
태중의 여정에서 액션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인물이 처한 절박함과 감정의 무게를 드러내는 핵심 장치다. 오랜 시간 액션 연기를 이어온 지창욱에게도 이번 작품의 신체적 강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장면들은 태중의 감정선이 가장 바닥까지 내려가는 구간이자, 배우의 체력과 연기 모두를 요구하는 지점이었다.
"교도소 씬 전반이 정말 힘들었어요. 맞고 구르고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컸는데, 특히 의무실 액션은 5일 정도 촬영할 만큼 가장 오래 걸린 장면이었죠. 컷을 굉장히 세밀하게 쪼개서 찍다 보니 액션은 대역과 제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요. 위험한 부분은 대역 배우가 해주고, 얼굴이 드러나거나 흐름을 이어야 하는 구간은 제가 직접 들어가 연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조각도시’의 서사를 끌고 가는 또 하나의 축은 태중과 요한의 긴장 관계다. 요한은 무자비한 악인으로 태중의 여정에 강한 대비를 만드는 존재다. 지창욱은 상대 배우와의 균형이 작품 전체의 밀도와 직결된다고 보고, 도경수가 만들어낸 에너지에 큰 신뢰를 드러냈다.
"저는 '조각도시'에서 요한이라는 캐릭터가 태중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태중이의 감정선을 시청자가 따라가지만, 그와 동시에 시청자들이 함께 바라보는 인물이 요한이기 때문에, 요한이 얼마나 무섭고 미스터리하게 보이느냐가 작품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준다고 느꼈죠. 그 부분을 경수가 너무 잘 채워줘서 든든했습니다. 마지막 액션 장면을 촬영할 때는, 무서울 때도 있었어요. 칼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가끔 경수의 눈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얘가 진짜로 나를 때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웃음)"
후반부에서 태중은 극단적 분노를 품고 있음에도 요한을 죽이지 않는 길을 택한다. 지창욱은 이 선택을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순간으로 바라봤다.
"태중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어요. 초반부터 죽어가는 식물을 태중이 살려내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게 태중의 근본으로 보였죠. 그래서 태중의 마지막 복수는 요한을 죽이거나 처단하는 게 아니라, 요한이 지은 죗값을 끝까지 치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태중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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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에도 태중은 단일한 감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다. 지창욱은 그 복합적인 상태를 어떻게 한 컷에 담아낼지 고민했고, 장면의 분위기나 서사적 기대보다 인물의 내면 흐름을 우선해 표현 방식을 찾았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어요. 아주 담담하게 갈지, 활짝 웃을지, 웃더라도 농도를 어느 정도로 할지 등등을 두세 테이크 정도 다양하게 시도했어요. 태중이 누명을 벗었다고 해서 이 인물이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저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어요. 이미 지나간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요. 동생은 죽었고,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요. 그래서 마지막 태중의 미소는 해방된 웃음이라기보다는, 흉터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웃음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순간부터 작품의 성패와 연결되는 책임감과 부담은 자연스럽게 따라붙기 마련이다.
"저는 이 일을 통해 돈을 받는 사람이잖아요. 그에 따른 책임과 역할은 항상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업을 하다 보면 예민해지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고, 누군가와 진지하게 부딪히기도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가요. 그렇다고 '한국을 대표한다', '배우 전체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으로 임한다기보다는, 내가 하는 작품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해요.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빨리 회의를 통해 보완하고, 바꾸고, 더 준비하려고 해요. 상업적인 작업인 만큼 투자와 성과가 중요하지만, 흥행을 의식하면서 연기하면 오히려 더 못하게 되더라고요."
지창욱은 직업적 특성상 선택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많은 배우들이 그 불안함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균형을 찾고 있다. 내년이면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는 불안의 크기를 줄이기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을 성숙하게 넓혀가고 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일이 없어질까 봐 불안했고,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게 무서웠던 적도 있었어요. 나쁜 평을 듣는 게 두려웠던 순간들도 많았고요. 다만 이 불안을 어떻게 대처하고 이겨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 느끼는 건, 예전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나이대가 한정돼 있었다면, 지금은 좀 더 다양한 나이의 캐릭터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서 다시 폭이 줄어드는 순간이 온다 해도, 그 안에서 또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저뿐만 아니라 선배들도 다 겪어온 과정이고,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마주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크게 두렵게만 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