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데이, 발렌타인 데이 이중고
입력 2025.03.15 08:08
수정 2025.03.15 08:08

3월 14일은 이른바 화이트 데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라고 알려졌다. 사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이벤트나 선물이 추가된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는 한 세트처럼 여겨졌다.
어느 정도 역사성이 있는 발렌타인 데이와 달리 화이트 데이는 그야말로 근본 없는 상업적 기념일로 보인다. 1977년에 일본 후쿠오카의 한 제과업체에서 마시멜로를 팔기 위해 3월 14일을 마시멜로 데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1978년에 일본 사탕과자공업협동조합에서 사탕을 팔기 위해 고심하다가 마시멜로 데이를 차용해, 그날이 사탕 주는 화이트 데이라고 선전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마케팅 캠페인이 1980년에 시작되면서 화이트 데이 문화가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론 러시아 유래설도 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은 3월이 되어야 살인적 극저온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3월에 봄 축제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축제를 즐기고 귀가하던 중 동사하자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며 보드카를 주고받다가 투명한 보드카에서 화이트 데이가 유래했다는 것이다.
화이트 데이 문화가 서양권엔 없는데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에만 있는 것을 보면 러시아 유래설보다는 일본 회사 마케팅설이 유력해보인다.
3월 14일에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게 된 건 그 전에 발렌타인 데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줘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자가 주는 날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요구에 부응한 게 화이트 데이인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 자체는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념일이다. 하지만 그날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문화는 동아시아에만 있는데 이 역시 일본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거 로마 제국에선 군복무 중 결혼이 금지됐었는데 발렌티노 신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결혼을 성사시켜줬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 전설로 인해 중세 유럽에서 성 발렌티노 축일인 2월 14일을 일종의 연인의 날처럼 여겼다고 한다.
영국의 초콜릿 회사 캐드버리가 1861년에,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선물하라는 마케팅을 시작했다. 이때는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그 마케팅을 일본의 초콜릿 회사가 차용했는데, 그러면서 여자가 남자에게 줘야 한다는 설정을 추가했다는 설이 있다.
영국 문화를 들이는 과정에서 단순 오역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본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여자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현대에 여성 인권 의식이 생기자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초콜릿을 여자가 주도적으로 줘야 한다는 마케팅 스토리가 떴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진실이 무엇이건 여자가 초콜릿을 주는 발렌타인 데이 문화가 일본에서 시작된 것 만큼은 유력해 보인다. 영국의 통치를 오래 받은 홍콩에선 남녀가 서로에서 주는 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업계의 상술이 발렌타인 데이를 여자가 주는 날이라면서 반쪽짜리로 만들어놓고, 다시 남자가 주는 화이트 데이라는 걸 추가로 만들어 병 주고 약 주고 이중과세를 시킨 셈이다.
발렌타인-화이트 데이라는 상업성 짙은 기념일에 우리 사회가 그동안 휘둘린 것이다. 다만 최근엔 이런 날들을 챙기는 문화가 과거처럼 뜨겁진 않다. 과거엔 발렌타인 데이는 무조건 챙겨야 하는 날이었고 그에 따라 화이트 데이의 중요성도 점점 커졌었다. 그 두 날을 모르고 지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때만 되면 편의점 등에 관련 상품이 쌓이고, 누군가에게 초콜릿 등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좋아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는데 하도 문화가 번성하다보니 동료들에게 다 주는 걸로 확대됐다. 그래서 사회생활하는 사람이면 이 두 기념일을 모르고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과거보다 관련 상품이 덜 쌓이고 초콜릿 등을 돌리는 풍습도 약화됐다. 젊은 연인도 이 날들을 과거처럼 특별하게 챙기지 않는 경우가 늘어간다.
아무래도 데이 문화가 너무 과열되다 보니 부담이 커졌을 것이다. 초콜릿, 사탕은 기본이고 선물에 이벤트까지 해야 하니 너무 힘들었다. 초콜릿도 고급화되면서 너무 비싸졌다. 선을 넘었기 때문에 일부는 손절에 나섰다.
이 데이들이 상업적 마케팅에서 유래한 거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더 부정적으로 된 측면도 있다. 최근 성별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들은 원래 남녀 구분이 없었던 발렌타인 데이에 왜 한국에선 여자가 줘야 하느냐는 불만을 토로했다. 남성들 사이에선 초콜릿 받는 대신에 이벤트를 해야 한다는 불만이 제기됐고, 겨우 발렌타인 데이를 넘겼는데 화이트 데이를 또 챙겨야한다는 부담도 컸다. 그렇다보니 더욱 데이 문화가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외국 업자들의 마케팅 데이에 우리 사회가 휘둘리는 것은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두 데이 문화가 위축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신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우리의 신종 기념일이 나타나면 좋겠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