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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훈풍에 HBM 순풍…더 거세진 中 굴기 [반도체 결산]

조인영 기자 (ciy8100@dailian.co.kr)
입력 2024.12.25 06:00
수정 2024.12.25 07:02

AI가 가른 희비…메모리 주도권 쥔 SK하이닉스

격해진 '반도체' 샅바싸움…美 규제 vs 中 굴기

트럼프 2기 체제·탄핵 정국…韓 기업 투자 '딜레마'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6월 2일 타이베이 국립대만대 종합체육관에서 한 '컴퓨텍스 2024' 기조연설에서 올 하반기 출시할 AI가속기 '블랙웰'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올해는 AI(인공지능) 시대 개화로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고부가 제품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개선된 한 해였다. AI가 차세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삼성과 SK는 기술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반도체 몸값이 높아지자 미·중 뿐 아니라 EU·일본 등도 전략적 투자를 실시하는 등 반도체 국가대항전은 지속됐다. 이 가운데 미국은 각종 규제를 실시하며 중국 견제를 이어갔고, 중국은 보란듯이 자체 기술 개발에 성과를 내며 '기술 굴기' 기조를 지속했다. 미국 대선에서 '미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AI가 가른 희비…메모리 주도권 쥔 SK하이닉스

올해 삼성·SK·마이크론 등 3대 메모리 제조사는 작년 부진을 딛고 나란히 조 단위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작년 8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낸 SK하이닉스는 올해 22조~24조원대의 영업이익을, 지난해 15조원 적자로 미끄러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은 16조~17조원대를 회복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회복은 AI 메모리 수요 강세로 HBM, eSSD, DDR5 등 고부가 제품 판매가 두드러진 영향이 컸다. 일반 D램 보다 가격이 5~8배 비싼 HBM 등의 호조로 메모리 반도체 ASP(평균판매단가)가 상승했고, 전체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HBM, eSSD 등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성장세가 뚜렷하다 보니 반도체 기업들은 앞다퉈 선단 공정 개발에 나섰다. 일찌감치 엔비디아-TSMC와 삼각연대를 구축한 SK하이닉스는 6GB(기가바이트)를 구현한 HBM3E 12단을 9월 말부터 양산중이다. 지난 3월에는 HBM3E 8단을 엔비디아에 공급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TSV로 수직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부가가치 제품을 말한다. 현재 제조사들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중이다.


AI칩 선두주자인 엔비디아는 올해 말부터 블랙웰(Blackwell) 양산을 본격화한 데 이어 후속 모델인 루빈(Rubin)도 출시를 준비중이다. 이들 AI 가속기에는 HBM3E, HBM4가 각각 탑재될 예정이어서 메모리 제조사들의 이익 개선폭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엔비디아의 블랙웰 기반 B100·B200에는 HBM3E 8단 8개가 탑재되며 블랙웰 울트라에는 HBM3E 12단 8개가 투입된다.


이에 질세라 마이크론도 지난 9월 36GB HBM3E 12단을 내놓으며 HBM 개발 경쟁을 가열시키고 있다. 삼성전자도 HBM3E 8단과 12단을 양산중이나, 엔비디아향 공급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회사 측이 지난달 "퀄 과정상 중요한 단계를 완료하는 등 유의미한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이후 공급 관련 공식 코멘트는 없다.


현재까지 메모리 3사의 성적을 미루어보면 SK하이닉스가 우세승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HBM 중심축이 올해 HBM3E 8단에서 내년 HBM3E 12단, HBM4로 이동할 것을 겨냥해 추격자들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는만큼 SK하이닉스가 선두 자리를 수성할지, 또는 내어줄지 관심이 쏠린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16일 페루 리마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반도체' 샅바싸움…美 규제 中 굴기 지속

첨단전략물자로서의 반도체 가치가 상승하면서 반도체 경쟁은 국가대항전으로 확전됐다.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첨단전략물자로 반도체가 대두되면서 각국은 제조 설비 투자·공급망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2022년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과시킨 미국은 반도체 장비 및 AI칩에 대한 추가적인 수출통제로 중국을 압박했다. 미국이 엔비디아 등 자국 기업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일 강력한 규제와 메시지를 쏟아내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기술 굴기'를 전면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인 셈이다.


이같은 미국의 제재는 HBM까지 확대됐다. AI 가속기 등에 탑재되는 핵심 부품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것이다. 이번 제재는 중국의 AI 반도체 개발을 막아, 궁극적으로 반도체 자립 속도를 늦추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HBM 제재로 한국 반도체도 영향권에 놓였다. 중국향 HBM 공급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삼성은 구형 HBM 제품 일부를 중국 등에 공급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삼성이 HBM 매출의 약 20%를 중국에서 창출하고 있다"고 했다. 엔비디아향 비중이 높은 SK하이닉스는 장기적으로 중국향 물량이 축소되는 상황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중국은 이같은 미 제재에도 불구하고 자국 반도체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의 수출통제로 반도체 장비 등의 국산화가 불가피해자, 중국은 반도체 제조장비, 팹리스(반도체 설계), 후공정에 이르기까지 가치사슬 전반 국산화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 D램 1위 업체인 CXMT(창신메모리)는 기존 허페이(Hefei) 외에 베이징을 중심으로 공격적으로 웨이퍼 생산능력을 증설중이다.


주력 제품인 레거시(범용) D램인 DDR4를 저가에 공급하며 전체 D램 가격을 깎아내리고 있다. 실제 11월 말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 평균 가격은 1.35달러로 전월 보다 20.59% 급락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잠정실적 발표에서 "중국 메모리 업체의 레거시 제품 공급 영향으로 실적이 감소했다"는 설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최근에는 DDR4에 이어 DDR5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가 술렁였다. 이달 중국 전자상거래 사이트에32G 용량의 DDR5 D램이 등장했으며 일부 상품 설명 페이지에는 CXMT가 적혀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진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첨단 제품에 속하는 DDR5까지 손을 뻗친 것은 그만큼 국산 기술 개발에 자신감을 어필한 것으로 읽힌다.


HBM 양산에도 역량을 집중하는 분위기다. 업계는 CXMT가 2세대 HBM(HBM2) 라인을 구축, 양산에 나선 것으로 파악한다. 아직 삼성·SK가 만드는 5세대 HBM(HBM3E)과 견줘 기술 격차가 있지만, 최첨단 D램을 생산할 역량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중국이 범용 D램 시장을 장악하고, 첨단 D램 기술 개발까지 격차를 좁힌다면 글로벌 메모리 시장은 크게 출렁일 수 있다.


미국이 때리고 중국이 반격하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는 새로운 출구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전체 반도체의 절반을 중국에서 생산하는 삼성과 SK으로서는 어느 한 편에만 호응하고 다른 한 편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경제·안보 측면에서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한국 반도체의 전략은 훨씬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2기 체제·탄핵 정국…韓 기업 투자 '딜레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으로 세계 경제의 대격변이 예상된다. 특히 반도체에서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와 '중국 때리기' 전략이 트럼프 2기 정부에서 더욱 견고해질 전망이다.


트럼프 후보는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해외 기업을 대상으로 한 보조금 지급을 줄곧 비판해온터라 해당 정책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삼성전자는 삼성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가동 시기는 오는 2026년이다. SK하이닉스도 인디애나주에 패키징 공장을 세울 예정으로 양사 모두 미 상무부와 반도체 보조금을 확정지은 상태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정부가 예정대로 보조금을 전액 지급할지는 미지수다.


후보 시절 트럼프 당선인은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관세를 높이면 그들(외국 기업)이 와서 반도체 회사를 공짜로 만들 것"이라며 미국 내 제조시설 내재화 전략을 언급한 바 있다. 보조금을 지원하는 대신 관세를 올리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알아서 미국에 투자 깃발을 꽂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난 15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다고 보조금을 철회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면 자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설비 구축 정책에 제동이 생기게 되는 만큼, 제도는 유지하되 내용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으로 미 현지 기업에 대한 지원 비중을 늘리거나 동맹국을 대상으로 한 가드레일 조항 및 보조금 지원에 대한 추가 조건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미 미국에 투자를 확정지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로서는 부담이 커진다.


예기치 못한 탄핵 정국을 맞이한 것도 변수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기여해온 메모리 가격이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은 큰 등락폭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정치·산업 혼란 속 내년도 사업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다.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은 기업 수출 측면에서 긍정적이나 장기적으로 보면 원자재값 상승으로 부담이 커진다. 해외에서 구매해오는 웨이퍼 등이 오르면 오를수록 제조원가가 커져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향후 장비·설비 반입 시 비용 부담이 늘어난다.


일각에서는 탄핵 정국이 장기화되면 원·달러 환율이 1450원, 1500원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어 기업들로서는 복합적인 대응이 필요해졌다.


반도체 사이클도 낙관적인 상황을 기대하기만은 힘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내수·수출의 경제 성장 견인력 동반 약화 우려' 보고서를 통해 우리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경기가 사이클상 하강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경쟁력 체질 개선이 시급하지만, 그간 업계가 촉구해온 반도체 특별법은 갑작스러운 탄핵 정국으로 통과가 불투명하다.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기업 근로자들의 경우 주 52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보조금 등 재정 직접 지원을 골자로 한다.


트럼프 2기 출범, 수출 동력 약화, 정치 리스크, 환율 상승 등이 한 데 얽히면서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은 당장 4분기부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증권가를 중심으로 내년도 실적을 비관하는 제기하는 전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비상경영에 준하는 내년도 사업 계획을 수립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인영 기자 (ciy8100@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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