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일easy] '인싸'에서 '아싸'로 내몰리는 인텔
입력 2024.09.14 07:00
수정 2024.09.14 07:00
산업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혹은 필연적으로 등장한 이슈의 전후사정을 살펴봅니다. 특정 산업 분야의 직‧간접적 이해관계자나 소액주주, 혹은 산업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데일리안 산업부 기자들이 대신 공부해 쉽게 풀어드립니다.
#포지티브적 해석 : AI 시대를 맞이하는 인텔의 성장통.
#네거티브적 해석 : 한물간 CPU 강자의 어설픈 혁신.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죠? PC나 노트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로고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해지기까지 인텔이 1990년대부터 브랜드 캠페인을 펼친 결과죠. 글로벌 시장 80% 이상의 PC에는 이 스티커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인텔은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요?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인텔은 CPU(중앙처리장치) 강자입니다. 말 그대로 4대 주요 기능인 기억, 해석, 연산, 제어를 담당하는 장치를 만들고 있죠. 그런데 CPU는 컴퓨터 내부 깊숙한 곳에 있지 사용자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매니아층 외에는 살면서 직접 PC나 노트북을 분해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과제가 인텔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고심 끝에 나온 '인텔 인사이드' 전략은 시장에 제대로 먹혀들었고 고객들은 CPU=인텔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이렇게 2000년대 초까지 인텔은 PC용 CPU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영원할 줄만 알았던 PC 시대는 스마트폰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2007년 혜성처럼 나타난 아이폰은 그 해 세계 최고의 발명품(타임지 선정)으로 꼽혔고 애플은 이후에도 승승장구를 거듭합니다. 애플이 미국 시가총액 상위권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효자' 아이폰 덕분입니다.
입지가 좁아진 인텔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스마트폰 확대로 PC 성장이 꺾인 상황에서 AMD, 퀄컴 등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옵니다. 설상가상으로 구글, 아마존 등 CSP(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업체)들은 CPU 자체 설계를 선언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인텔의 시장 지배력은 점점 축소되겠죠.
인텔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기회를 봅니다. AI 시대가 열리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AI칩을 만들어주는 파운드리를 다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 정책과도 맞아떨어졌습니다. 미 정부는 반도체칩과 과학법에 따라 대출(최대 110억 달러)까지 합쳐 총 195억 달러라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약속했습니다.
정부가 돈을 쥐어주면서까지 반도체를 키워주겠다는 데 마다할 기업이 있나요. 팻 겔싱어 인텔 CEO는 "2030년까지 세계 2위 파운드리업체가 되겠다"다는 야심찬 전략을 공개합니다. 삼성전자를 누르고 1등 대만 TSMC를 바짝 뒤쫓겠다는 포부였습니다. 1강-1중 체제인 파운드리가 1강-2중으로 바뀔 가능성을 놓고 시장은 들썩였습니다.
인텔은 보란듯이 미국에 애리조나주를 비롯해 뉴멕시코주, 오하이오주, 오리건주 등에 생산거점을 확보합니다. 유럽에는 독일, 아일랜드, 폴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에 파운드리, 후공정(OSAT), 설계(디자인), R&D(연구개발) 시설 구축에 나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운드리 2인자' 계획에 균열이 생깁니다. 파운드리 재진출 선언 이후 3년 만입니다. 기술 성과가 나기도 전에 너무 많은 비용을 끌어다 쓴 결과인가요. 8월 초 발표한 2분기 실적에서 인텔은 매출 128억3000만 달러(17조1900억원)에 순손실 16억1000만 달러(약 2조1500억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합니다. 분기에만 조 단위 적자라니. 시장은 또 들썩입니다.
여기에 반도체 설계 회사 브로드컴은 인텔의 최첨단 1.8A 제조 공정이 아직 대량 생산으로 전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기름에 불을 들이붓습니다. 당초 인텔은 18A급 공정을 연말까지 제조 준비를 완료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런데 테스트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오니, 파운드리 경쟁력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수십 조 단위의 파운드리 투자에 대한 의구심, CPU 등 본업 경쟁력 우려가 지속되는 회사에 베팅할 주주가 있을까요. 인텔의 주가는 올해에만 60% 가까이 떨어졌습니다. 인텔은 2분기 실적 발표 직후 15%(1만5000명) 감원, 배당금 취소 등으로 비용 절감을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대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팻 겔싱어를 비롯한 주요 경영진은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고 자본 지출을 개편하는 계획을 이달 중 내놓을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인텔 파운드리 사업을 분리하고 기존 반도체 공장 계획을 취소하는 방안이 포함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FPGA(프로그래머블 반도체) 알테라 매각, 자율주행 자회사 모빌아이 지분 매각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PC 시대 강자였던 인텔. 스마트폰 시대에 밀린 뒤 AI를 지렛대로 화려한 부활을 꿈꿨지만 꽃도 피워보기 전에 시들어버릴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본업이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십 조원이 투입되는 파운드리 투자를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을 하루라도 빨리 잠재워야 합니다. 모두가 이 회사의 출구 전략을 주목하지만, 인텔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