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구국의 DNA…"춘천대첩,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 [김진태 지사 인터뷰 ⑤]
입력 2024.08.23 05:00
수정 2024.08.23 05:00
[강원 김진태 - 1등 도지사를 만나다 ⑤]
"춘천대첩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 구축도
유엔군 올 시간도 없이 끝장났을 수 있다
사흘의 시간 벌어준 정말 중요했던 전투"
김진태 강원특별자치도지사가 7월 광역자치단체 평가에서 국민의힘 소속 12명의 시·도지사 중 도정운영 긍정평가 1위로 치고올라갔다. 긍정평가 52.4%로 국민의힘 '텃밭'인 영남권 시·도지사들도 뛰어넘었다.
주목할만한 지점은 '정당지표 상대지수'에서 103.8점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100점이면 해당 권역 정당 지지율과 일치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100점보다 낮으면 정당 지지자보다 시·도지사 지지자가 적은 것이며, 100점보다 높으면 정당 지지자보다도 시·도지사 지지자가 많다는 의미가 된다. 정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김 지사의 도정 성과를 높이 평가하는 강원도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비결이 무엇일까. '진정성'이 없으면 도정에 진심일 수 없다. 대한민국이 살아남느냐 망하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나라를 구했던 강원의 DNA가 있는 그이기에 도지사 취임 2년여간 매사 진정성을 갖고 임했고, 그 진정성이 도민들에게 와닿았기에 도정운영 평가도 우상향·고공행진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분석이다.
강원도의 수부 도시 춘천은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 도시'다. 임진왜란의 3대첩이 한산도 대첩·진주 대첩·행주 대첩이라면 6·25 전쟁의 3대첩은 춘천 대첩·낙동강 전투·인천상륙작전이다.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은 잘 알려져 있지만 춘천 대첩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춘천 대첩은 전쟁 극초반 춘천 방면으로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해 서부 전선에서 패주하던 국군이 포위 섬멸 당하는 것을 막고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초석을 놓은 전투다. 춘천 일대에서 우리 군은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민군에 다대한 타격을 주고 6월 28일까지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중동부 전선의 인민군은 춘천에서 홍천-가평 방면으로 우회 기동해 먼저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서부 전선에서 패주하는 우리 국군을 포위망으로 몰아넣고 섬멸하려 했다. 이러한 인민군의 구상대로 됐더라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병력이 없고, 유엔군의 증파를 기다릴 틈도 없이 김일성의 호언대로 8월 15일까지 전국토가 적화당할 뻔 했던 것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춘천 강원도청에서 취재진과 만난 김 지사는 춘천 대첩을 소재로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춘천 대첩, 3일의 기억'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밝아졌다. "봤느냐. 거기 (내가) 출연도 했다"며 "다큐멘터리 영화여서 인터뷰 영상으로 출연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김 지사는 인터뷰 영상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냈던 이렇게 중요한 전투(춘천 대첩), 그것도 우리가 승전보를 울렸던 전투를 잊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춘천에서, 이 강원도에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널리 알려서,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진태 피 안에 흐르는 건국·구국의 DNA
'대한민국 건국 부정설' 받아들이지 못해
강원도민과 춘천시민이 피 흘리며 지켰고
외조부 순직·희생당한 대한민국 위해…
단순히 도백(道伯)이라서 영화에 출연한 게 아니다. 김 지사의 부친은 6·25 전쟁의 참전 용사로 화랑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으며 대한민국을 구했다.
또 김 지사의 외조부는 전쟁 발발 당시 강원도교육청 장학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1950년 6월 29일 북괴가 춘천 일대를 장악한 직후 인민군에 의해 희생당했다. 지금도 도교육청 앞에는 '6·25 희생·순직 강원교직원상'이 있다. 김 지사도 매해 호국보훈의 달인 6월, 도교육청을 찾아 동상 앞에 분향하고 추념비를 닦으며 "여기서 내 DNA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짐하곤 한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불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 지사가 이번 광복절 '대한민국의 건국'에 관한 논쟁을 피하지 않은 것, 피하지 못한 것 또한 이러한 DNA로부터 유래했다는 관측이다.
건국한지 2년만에 전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음에도 외조부가 희생당하고 부친이 한몸을 던졌으며, 강원도민과 춘천시민의 피로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그 대한민국이 '건국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는 '1948년 건국 부정설'을 김 지사의 DNA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고려가 918년에, 조선이 1392년에 '건국' 됐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됐다고만 하면 벌떼처럼 난리를 친다.
1919년에 임시정부를 세운 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 이후 연결됐어야지, 1948년에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세력이 있는 것이다. 한반도 국가의 정통성이 대한민국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세력들이리라.
그리고 김 지사는 '춘천 대첩'을 통해 수많은 강원도민과 춘천시민이 피를 흘리며 지켜낸 대한민국, 외조부가 희생당하고 부친이 싸워서 지켜낸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정통성을 흠집내는 이러한 세력과 계속해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김진태 지사와 다큐멘터리 영화 '춘천 대첩, 3일의 기억'과 관련해 주고받은 문답이다.
ㅡ 올해 다큐멘터리 영화 '춘천 대첩, 3일의 기억'이 개봉했다. 6·25 전쟁 당시 이곳 춘천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했던 '춘천 대첩'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들었는데, 지사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보셨느냐. (내가) 거기 출연도 했다. 그게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인터뷰 영상으로 출연을 했다.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려고 했고, 흥행이 좀 더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기술 시사회에도 참여해서 서로 의논도 하고 그랬다.
이 6·25의 '3대 대첩', 우리가 이긴 3대 전투가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춘천 대첩이다. 다른 대첩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전쟁 초기에 춘천 대첩이 없었더라면 낙동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증파돼 인천상륙작전을 벌일 틈이 없이, 완전히 대한민국이 끝장 났을 수 있다. 우리나라를 구한 전투다.
영화의 부제가 '3일의 기억'이라고 돼있지만 말그대로 사흘 동안이나 시간을 벌어줘서,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을 줘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전군에 외출·외박·휴가를 보내고, 장교들은 파티를 했다. 서울에서는 술을 마시면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지만 우리 춘천에 주둔하고 있는 6사단 김종오 장군은 '이것 지금 심상치 않다. 적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 '휴가는 무슨 휴가냐. 휴가 나간 사람들도 다 들어오라'고 해서 비상대기를 시켰다.
그동안 몇 차례나 첩보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육군 수뇌부에서는 다 무시하고 '무슨 전면전이냐' 그러고 있었다. 여기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지휘관만 '상황이 심각하다'고 해서 비상대기를 걸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실제로 터져버렸으니 6사단이 아니면 막을 병력이 없었다. 실제 그랬던 상황이 영화에도 잘 나와 있다.
나는 기술 시사회에서 봤고, 도청에서는 지난달에 따로 시사회를 해서 직원들이 많이 본 것으로 알고 있다."
ㅡ 지사의 일가도 6·25 전쟁, 또 춘천 대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6·25 참전용사다. 아버지가 춘천 대첩에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해서 화랑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으셨다.
우리 외할아버지가 그 때 강원도교육청 장학사였는데 1950년 6월 29일, 전쟁이 터지고 나흘만인데 인민군에게 희생을 당하셨다. 외할아버지 혼자만이 아니라 강원도 다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나 또다른 장학사 이런 분들이 여럿 그 때 인민군에게 순직을 당하셨다.
그 때 희생·순직을 당하신 분들의 동상을 강원도교육청 앞마당에 설립했다. 지금도 계속 추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