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무엇이든지…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을지공간’ [공간을 기억하다]
입력 2024.05.16 17:29
수정 2024.05.16 20:33
[다시, 소극장으로④] 서울 종로구 소극장 을지공간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오프(OFF) 대학로, 온(ON) 을지로
명실공히 대학로는 한국 연극의 산실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인사동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 문화지구로 지정됐다. 그런데 대학로 문화지구 지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소극장 연극인들을 오히려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기업들이 대학로에 진출하면서 시장이 상업적으로 변했고, 사람들이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부동산에 대한 조세감면, 용적률 혜택, 융자지원 등 정부지원혜택택은 건물주에게 유리하게 제공됐다. 결국 이 시기, 많은 소극장이 대학로를 떠나거나 사라졌다. 이를 기점으로 ‘오프 대학로’ ‘탈 대학로’ 현상에 불이 붙었다.
2018년 을지로 4가, 철공소가 모여 있는 골목의 건물 4층에도 익숙한 대학로를 벗어난 소극장 ‘을지공간’이 들어섰다. 소극장이 모여 있는 대학로와는 전혀 다른 생경한 풍경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오히려 다양한 사람과 관심사가 공존하는 이 공간이 가지는 매력은 더없이 이색적이고 특별하다. 이 공간을 운영하는 김태형 대표(예명 코난)가 대학로가 아닌, 을지로에 터를 잡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을지공간은 지리적인 특색만큼이나 공간이 갖는 특징도 흥미롭다. 을지공간은 옛스러움과 현대적인 감각이 조화롭게 섞인 을지로의 풍경을 닮아가고 있다. 가장 먼저 운영을 시작한 소극장 을지공간(4층) 그리고 와인바 온더무브(On the move) 겸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는 5층, 사무실 겸 각종 모임이 열리는 3층 을지아트쌀롱까지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인 셈이다.
특히 이 공간들에는 김 대표의 운영 철학이 짙게 묻어난다. 김 대표와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창작집단 불확정성의 원리는 환경적인 지속가능성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을지공간만 보더라도 공연장의 모든 조명은 LED를 활용하고, 자체 기획 작품에서는 공연 후 버려지는 쓰레기는 만들지 않기 위해 무대 제작을 과감히 포기한다.
대신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없는 가변형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으로 무대를 다채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대관 시에도 최대한 ‘그린씨어터’라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많은 예술인들이 취지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김 대표의 을지공간 운영 기조다.
그린씨어터·다양성, ‘을지공간’을 이끄는 핵심 가치
“이 일을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좋아서 하는 거죠. 만약 그랬다면(직업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소극장 을지공간에는 운영자의 공간에 대한, 연극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장소를 빌려주고, 공연을 올리고, 수익을 내는 단순한 비즈니스의 개념을 넘어서 예술가로서 이 공간을 얼마나 가치있게 만들고, 가치있게 쓰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고민을 실천으로, 실천은 참여와 향유로 이어지고 있다.
“연극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던 김 대표지만 그는 학창시절부터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생활하고 미국 변호사로, 외국법자문사로 일하면서도 그는 연극 배우로 무대에 올랐고,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다. 공동대표는 우스갯소리로 “예술을 하기엔 국영수를 너무 잘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 한켠에 키워오던 ‘극장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실현시키고자 결심했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내려놓는 것에도 결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에겐 이 결심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정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일에 굉장히 만족도가 높아요. 누군가는 ‘직장 생활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한다고들 하는데 전 전혀 아닐 것 같아요. 후회 없어요.”
현재는 창작집단 ‘불확정성의 원리’와 이주민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창작단체 ‘서울컬쳐클럽’ 등 총 4개의 단체가 터를 잡고 활동하고 있지만 가능하면 더 많은 예술인이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복합문화공간으로 3개 층을 다양하게 활용, 운영하고 있다.
“이 공간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만든 공간이 극장이었어요. 사실 이름을 만들 때 몇 가지 특색있는 이름들을 생각했죠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 나름 멋들어지는 이름들 있잖아요(웃음). 그런데 극단을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특징 있는 이름을 가지고 하게 되면 캐릭터를 부여할 것 같아서 중립적인 이름을 써야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름을 지은 거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을지공간’이라는 이름이 가장 중립적이지 않을까 했던 거고요. 앞으로도 더 많은 예술인이 오셔서 공연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김 대표는 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은 ‘예술인의 자유’에 맡겼지만, 공간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핵심 가치’에 있어서는 확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연장은 ‘그린씨어터’를 표방하고 있고 5층 ‘온더무브’는 비건 지향 레스토랑 운영 등 환경적 지속가능한 창작 및 공간 운영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한다. 또한 연령과 국적, 언어, 성별, 인종 등에 장벽을 두지 않고 공존의 가치를 추구한다.
“쉽게 말하면 친환경이죠. 말뿐인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장 식당의 모든 음식을 비건으로 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자원은 재활용 하고 낸난방은 최소한으로 하고요. 처음부터 극장 내의 모든 조명은 LED로 설치했어요. 자체 공연에서는 무대 제작을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큰 방향성은 다양성의 존중입니다. 단순히 관용과 비차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장벽을 두지 않고 다름 자체를 축복하고 환대하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요.”
한국 사회에서 친환경이나 기후위기, 다양성을 화두에 올린다는 것이, 그것을 기조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지만 여전히 겉핥기인 경우가 많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김 대표가 어려운 길을 굳이 걷고자 하는 건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편하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인테리어도 예쁘고, 무대도 예쁘게 만들 수 있지만 이것은 나를 포함한 우리 단체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결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누구보다 뚜렷한 철학으로 김 대표는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꿈꾸는 공간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올해는 서울컬쳐클럽의 공연예술페스티벌이 가을과 겨울에 각각 열리고, 6월엔 영어뮤지컬쇼케이스를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