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돈치치 귀화와 한국축구 ‘순혈주의’
입력 2008.11.2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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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몬테네그로 출신의 인천 공격수 라돈치치가 한국으로의 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팬들의 이목을 끌어당긴다.
일부에서는 이제 한국도 K리그에서 우수한 기량을 검증받은 외국인선수들을 귀화시켜 대표팀에 발탁해야한다는 주장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
라돈치치와 성남의 브라질 출신 공격수 모따 등은 이미 예전부터 국내 귀화설이 거론됐던 선수들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국내무대에서 활약하며 이미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귀화를 위한 조건(5년 이상 국내 거주)도 모두 채웠다.
선수 본인들도 한국 귀화를 통해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것에 긍정적인 뜻을 밝힌 바 있다.
라돈치치
■ 귀화는 세계축구의 대세?
외국인선수들의 한국 귀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신의손(사리체프 /러시아), 전남의 이싸빅(싸빅/크로아티아)과 이성남(데니스/러시아) 등이 K리그에서 활약하다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며 귀화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한국 귀화 이전에 모국의 대표팀에서 출전했던 경력이 문제가 되어 당시 FIFA 규정상 한국 대표팀에서는 활약할 수 없었다. 이들의 귀화 역시 대표팀보다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국내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2002년 당시 월드컵을 앞두고 샤샤, 마시엘, 산드로 등 국내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던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 ‘귀화 후 대표팀 발탁’설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는 아직 단일민족에 관한 ‘순혈주의’ 정서가 강한 데다 귀화 선수들의 실질적인 활용도나 효율성을 놓고도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세계축구에서는 이미 순혈주의의 장벽이 무너진 지 오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아트 사커´의 전성시대를 이끌며 프랑스에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겼던 지네딘 지단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아프리카 알제리계 이민자 출신이다.
티에리 앙리, 클라우드 마켈렐레, 시드니 고부, 패트릭 비에이라, 마르셀 드사이, 릴리앙 튀랑, 다비드 트레제게 등도 모두 순수 프랑스 혈통이 아닌 프랑스령 소속이거나 해외 이민자 2세 출신들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드물게 가장 많은 흑인 선수들이 활약하는 팀이기도 한데, 이들 대부분이 아프리카계 이민자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자국 내에서 우승을 차지한 프랑스월드컵 당시 23명의 엔트리 중에 순수 프랑스계 출신 선수들이 적었다는 사실은, 우승을 차지한 이후에도 자국 내 극우 정치가들이 논란의 빌미로 삼기도 했다.
프랑스가 귀화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가장 성공을 거둔 케이스라면, 브라질은 세계축구에 가장 많은 귀화 출신 슈퍼스타들을 공급하는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스타들의 산실’로 불릴 만큼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한 브라질에서는 쟁쟁한 선수층 사이에서 빛을 보지 못했거나 대표팀에 발탁될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이 외국으로 귀화, 제2의 축구 인생을 개척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스페인의 유로 2008 우승을 견인했던 마르코스 세나, 포르투갈의 데쿠, 크로아티아의 에두아르도 다 실바, 터키의 메멧 아우렐리우, 폴란드의 호제르 게레이로 등은 모두 브라질 출신이다. 이웃나라 일본도 루이 라모스, 알렉스 등 브라질 선수들을 귀화시켜 월드컵 대표팀 멤버로 활용한 전례가 있다.
이밖에도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과 상대했던 폴란드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국내팬들에게 친숙한 엠마뉴엘 올리사데베는 나이지리아 출신이었다. 독일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루카스 포돌스키는 이웃 나라인 폴란드계 출신이었다.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는 칼리드 불라루즈, 콜린스 욘, 조지 보아텡 같은 선수들처럼 프랑스와 같이 아프리카계 이민자 출신 선수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세계축구에서 귀화 선수들의 중용은 당연한 추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 역시 순혈주의 정서에 집착할 필요 없이 외국인 선수들의 귀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 한국축구, ‘귀화’에 신중한 이유
한국축구는 아직까지 대표팀에서 외국인 출신의 귀화 선수들을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국내 축구인들도 전례가 드물다는 것을 들어, 외국인 선수들의 귀화에 대해 신중한 반응이다.
경남의 조광래 감독이나 성남의 김학범 감독은 지난 9월경 일부 외국인 선수들의 귀화추진이 화제로 떠오르자,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피력했다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일단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귀화의 목적과 그 가치다. 그저 순수하게 한국을 사랑해서라면 분명 환영할 일이다. 설사 국내에서의 프로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귀화라 할지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외국인 선수의 ‘자유의사’다.
하지만 그 목적이 단지 프로생활을 넘어 국가대표팀 발탁을 전제로 한 ‘조건부 귀화’에 이르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국적문제가 단순히 태극마크를 달기 위한 거래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이 한창 공격수 부재로 고민하던 시절에, K리그에서 맹활약하던 외국인 선수 샤샤를 귀화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여기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오히려 외국인 사령탑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기량도 기량이지만, 단기간에 전력보강을 위해 섣불리 외국인 선수를 귀화시키는 것이 팀플레이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표팀이 단순히 월드컵을 앞두고 그저 ‘일회용’으로 외국인선수들을 귀화시키겠다는 발상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은 맹목적인 순혈주의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을 떠나 국내 선수들과의 조화나 문화적 차이 등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귀화설이 거론되는 외국인 선수들의 재능 자체는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이들이 과연 대표팀에 발탁해야할 만큼 절실한 선수이냐 하는 문제와 함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한국축구 문화에서 기존 국내 선수들과 융화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또 발생할 수 있다.
소속팀에서는 외국인 선수로 대우받고 활약했을지라도, 귀화를 하고 한국 대표선수로서 발탁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표팀에 관한 한국적 정서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귀화 선수들만 특별하게 배려하다가는 오히려 국내 선수 간 위계질서나 팀워크가 무너질 수도 있다. 국내 축구인들이 외국인 귀화에 대하여 신중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런 단체 스포츠에서의 팀 화합의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한국축구도 더 이상 순혈주의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재능이 있고, 한국축구에 관해 의욕과 애정이 있다면, 국적과 피부색을 불문하고 문호를 개방해야한다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하지만 반대로 귀화 문제를 너무 낭만적으로 접근해서도 곤란하다. 귀화가 거론되는 선수들이 당장 한국축구 판도를 뒤흔들만한 가치를 지닌 것도 아닌 데다 특히 대표팀 발탁을 전제로 한 귀화 선수 등용이라면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선수들의 귀화 가능성에 대해 번번이 일회성 해프닝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면, 한국축구계 전반에서 공론화된 제도적 논의가 필요한 순간이다.[데일리안 = 이준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