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손기정 VS 리얼 마라토너 서윤복 in 1947보스톤 [홍종선의 캐릭터탐구㊽]
입력 2023.09.18 07:34
수정 2023.09.27 14:36
감독 강제규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영화 ‘1947 보스톤’를 연출했을까
같은 소재를 영화화해도 ‘주인공이 누가 될까’는 작가와 연출의 선택이다.
영화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빅픽쳐,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콘텐츠지오)의 주인공은 손기정이 될 수 있었고, 남승룡이 될 수도 있고, 서윤복이 주인공이 되는 게 보통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는 이가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어떤 인물의 뇌를 영화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삼을 것이냐에 따라 1번 주인공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손기정이 주인공인 경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우승을 거머쥔 불세출의 마라토너 손기정. 시대가 일본제국주의였고, 손기테라는 이름으로 참가했고, 금메달은 일본의 것이 됐다. 수상대에 올라 일장기를 가린 통에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뒤 비애감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낸다. 손기정의 속내와 상관없이 대중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그러다 슬럼프에서 벗어날 기회가 온다.
손기정 마라톤 제패 10주년(1946년)을 기념하는 마라톤에서 부상한 서윤복을 제대로 스포츠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라토너로 키워낸다. 어렵사리 1947년 보스톤국제마라톤대회까지 가지만, 독립한 지가 언젠데 여전히 미군정 통치 하의 난민국 취급을 당하고. 여전히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 대신 성조기를 달아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때, 국가대표팀 감독 손기정의 기지와 가슴 뜨거운 연설로 드디어 태극기를 달고 우리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회를 만들어낸다.
남승룡이 주인공이라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에 빛나는 남승룡은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자 후배 양성에 나선다. 일본선수가 아닌 자랑스러운 대한의 선수로 뛸 국가대표팀을 창설하려는 것이다. 국가가 독립은 했으나 아직 그 온기가 스포츠에까지 이르지 못할 때, 집문서 담보 잡아 사비로 선수들을 먹이고 훈련시킨다. 베를린올림픽 제패 10주년 마라톤도 연다. 모든 판을 다 깔고 사력을 다하면서도 대중이 바라보는 것은 손기정인 것을 알기에 기꺼이 대표님 감독 자리를 내준다.
멸사봉공의 정신이 뛰어난 남승룡은 코치로서, 선수들의 엄마로서 물심양면 대표팀을 떠받친다. 손기정이 양지에 있다면, 기꺼이 그늘을 자처하며 궂은 일이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1947 보스톤마라톤 참가 자격이 주어지자 35세의 노구로 출전한다. 국제대회가 처음인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베를린 이후 달릴 수 없었던 손기정과 달리 계속해서 단련해 온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고, 심지어 세계 각국에서 온 기록 보유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12위에 입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서윤복이 주인공으로 나선다면.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몸이 허약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가파른 고갯길을 한달음에 뛰어올라 성황당 젯밥을 가져오던 어린 윤복이 있다. 배 꺼진다고 뛰지 말고 걸으라고 엄마가 말해도 윤복은 달리는 게 좋고, 커서 손기정처럼 마라톤 금메달을 따겠다는 꿈을 꾼다. 꿈은, 희망은 가난 속에서도 소년을 키운다. 먹인 것 없고 입힌 것 없는데 아이는 자라 고려대에 입학하고. 학생이 되고도 끼니를 위해 잘하는 달리기를 활용해 국밥집 음식을 배달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다. 마음속 롤 모델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금메달 10주년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당당히 1등으로 결승선 테이프를 가른다. 하지만 윤복에겐 여전히 아픈 어머니가 있고, 가난이 발목을 잡는다. 남승룡 코치님이 주는 돈을 받으며 공사장에 나가는 대신 훈련에 참여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무겁다. 손기정 감독님은 아픈 속도 모르고 혼만 낸다. 달리기를 때려치우고 다시 공사장으로 향하는데, 마음은 마라톤을 향해 달린다. 젯밥으로 끼니를 이을 때도 꿈이 있었는데, 이젠 먹구름만이 드리운 청춘이다.
서윤복은 이대로 주저앉아야 할까. 이후, 인생 바닥을 친 윤복은 비상한다. 그 곁에는 손기정, 남승룡이 있다. 누구도, 마라톤을 잘 안다는 해외의 그 어느 전문가도 예상 못 한 일을 서윤복은 1947년 보스톤에서 해낸다. 밥을 얻을 수 있다면 성황당 가파른 산길도 가뿐했던 윤복의 튼튼한 심장과 다리가 기적을 일군다. 대한독립 만세다!
영화 ‘1947 보스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묘하다. 딱 답을 못 하겠다. 손기정도 남승룡도 아니고, 서윤복만도 아니다. ‘셋이 함께’이다. 위의 가정 3가지 모두가 영화에 있다. 강제규 감독은 세 인물의 뇌 누구를 통해서도 영화로 들어갈 수 있게 ‘1947 보스톤’이라는 집을 지었다. 이 입구로 들어갔다 저 출구로 나왔다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도 되게 설계했다.
이 와중에 하나 더 일반적이지 않은 게 있다. 제목이 ‘1947 보스톤’이면, 보스톤에서 한국 마라톤의 새 역사를 쓴 서윤복을 뜨겁게 그린다. 뜨겁게 살고, 뜨겁게 달린다. 그런데 영화 ‘1947 보스톤’ 속 서윤복은 언제나 차분하다. 달릴 때도 차분하다. 배우 임시완의 연기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고, 달릴 때는 진짜 마라토너 같다. 숨을 헉헉 대고 긴장과 감동을 인위적으로 고조시키는 법 없이, 진짜 선수가 경기에 집중하며 무아의 경지에서 달리듯 그렇게 달린다.
대신 손기정이, 감독 손기정이, 민족의 영웅 손기정이 흥분하고 일을 낸다. 영화 ‘1947 보스톤’에서 손기정은 사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문제도 일으키고, 충돌도 일으키고, 속 시원히 한 방도 먹이고, 위기를 해결한다. 손기정의 발자취, 손기정의 말과 행동을 따라 이야기의 수레바퀴가 구른다. 우리를 대신해서 영화 ‘1947 보스톤’에 들어가 우리를 이야기의 주인공 서윤복 곁으로 데려가 준다.
그래서 손기정, 서윤복 중 누가 주인공이냐고? 해답은 영화를 본 당신의 머리와 가슴, 생각과 느낌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