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고래' 싸움에 日 '새우등' 커진다…K반도체 갈 길은
입력 2023.05.25 11:18
수정 2023.05.25 14:28
日, '반도체 부흥' 위해 다국적 기업 투자 유치 및 자국 기술 개발 '총력'
中 굴기 저지하고 대만 의존도 낮추려는 美, 日과 반도체 협력 가속화
견제 받는 K반도체, 초격차 기술 및 국내 공급망 속도전으로 위상 공고히해야
'반도체 부흥'을 노리는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 일본 총리가 직접 나서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를 요청하는가 하면, 차세대 기술 개발을 위해 수십 조원을 투자하는 등 30년 전 전성기를 재현하려는 모습이다.
이같은 행보는 중국의 첨단산업 굴기를 좌절시키고, 대만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려는 미국의 전략과 맞물려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도체 격랑 속 한국 기업이 위축되지 않으려면 초격차 기술 개발 및 국내 공급망 확충에 속도를 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일본은 현지 기업을 중심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연합군을 결성하는 한편 메모리-파운드리-R&D(연구개발)을 아우르는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며 '반도체 재도약'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최근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 TSMC, 미국 IBM·인텔·마이크론·AMAT, 벨기에 IMEC 등 반도체 생산업체·연구기관과 자리를 갖고 일본 내 투자를 요청했다. 일본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놓고 총리가 기업인들을 직접 설득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일본의 요청에 마이크론 등은 '통 큰' 투자로 화답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는 일본에 최대 5조원을 투자해 히로시마 공장에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오는 2026년부터 히로시마에서 차세대 D램 양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리 1위 기업인 TSMC는 현재 약 11조원을 들여 구마모토현과 이바라키현에 반도체 생산 공장과 개발 거점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도 일본 요코하마시에 첨단 반도체 장비 시제품 라인을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기업들도 일본 현지에 시설을 투자하는 한편 인력도 채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도체 '큰 손'들의 잇따른 투자로 일본의 반도체 산업 성장은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일본은 세계 3위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안정적인 국가이자 기술강국으로 전자, 자동차, 기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탈중국 및 미중디커플링 상황에서 일본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시다 집권 이후 세금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투자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도 효과가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일본은 시설 투자를 진행중이거나 계획을 밝힌 기업들에게 파격적인 세제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TSMC는 일본 반도체 공장 건설로 일본 정부로부터 5조원에 가까운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론도 2조원 가량의 보조금이 예상된다.
최근 일본 경제산업상은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 기업이 일본에 거점을 설립하면 보조금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며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기도 했다.
일본은 다국적 기업 뿐 아니라 자국 업체에도 반도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키옥시아, 토요타자동차 등 일본 기업 8개사가 뭉친 라피더스(Rapidus)가 대표적이다. 라피더스는 2027년까지 2나노미터 공정의 최첨단 파운드리를 양산하겠다는 목표로, 향후 대만·한국의 최대 파운드리 경쟁자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본의 행보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고, 한국·대만 의존도를 줄이고자하는 미국의 전략과도 맞닿아 있는 만큼 더욱 탄력을 받게 될 전망이다.
미국은 수 년 전부터 지정학적 리스크를 가진 대만 반도체에 대한 우려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에릭 슈미트 전 알파벳 회장은 지난해 공동기고문을 통해 "만일 대만 반도체 생산능력이 중국의 손에 들어갈 경우 미국 기술 산업은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패트릭 겔싱어 인텔 CEO는 올 초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30년 전에는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 생산의 80%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아시아가 그렇다. 이런 구도는 수정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 입장으로서는 지정학적 우려가 없으면서,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일본과 손 잡는 것이 이득이다. 일본도 공급선 다각화를 목표로 이뤄지는 미국의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미국과 일본이 최근 반도체, 양자컴퓨터 연구개발에 2700억원 이상을 공동 투자하겠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과거 미국은 일본 반도체 성장을 견제했지만, 이제는 대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 반도체 부활에 도움을 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미·중 패권 다툼 속 공급망 대안으로 부상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은 보다 촘촘한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메모리 점유율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을 의식해 일본과 손 잡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만큼 자체 역량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파운드리 사업을 메모리 못지 않게 키울 것을 목표로 세운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서버용 반도체, 차량용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등 차세대 시장을 겨냥한 맞춤 기술을 발굴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미 챗GPT를 통해 생성형 AI 수요가 확인되고 있으며, 자율주행차 등 미래 자동차 기술 구현을 위해 AP, GPU(그래픽처리장치), 인포테인먼트 기술 등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차세대 반도체 수요는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공통적으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속도전도 거론된다. 용인 클러스터에 파운드리 공장이 건설되면 그간 TSMC에 크게 벌어진 파운드리 격차를 좁히게 되며, 이를 통해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할 '규모의 경제'를 갖출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파운드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한국 반도체는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초격차 기술로 우리 위상을 공고히하는 동시에, 발 빠른 국내 투자로 세계적 수준의 반도체 공급망이 마련될 수 있도록 민·관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