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배우발견㊵] ‘젠틀맨’ 주지훈, 대세 배우의 ‘이유 있는’ 선택
입력 2022.12.28 09:52
수정 2022.12.28 11:57
명쾌하고 솔직한 인터뷰…생태계 살피는 ‘영화인’으로 성장한 주지훈
영화가 경제적 이득을 내는 산업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화로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담아내고 전승하기 위해서는 블록버스터 기획 영화만 존재해서는 부족하다. 중소규모 영화들이 맥을 이으며 제작되고, 다양한 장르영화들이 시도되고, 예술영화가 숨을 쉴 여력이 있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제작 배경과 장르는 다르지만, 배우 마동석과 정경호·오나라 주연의 ‘압꾸정’, 배우 주지훈과 최성은·박성웅 주연의 ‘젠틀맨’이 이러한 노력과 맥락 위에 서 있다. 중규모 영화에 주지훈이나 마동석 같은 스타가 주연배우로 나서는 것은 제작자에게 또 한국 영화에 큰 힘이 된다.
지난 23일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젠틀맨’(감독 김경원, 제작 ㈜트릭스터,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주역, 주지훈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꽉 찬 스케줄을 소화 중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주지훈, 자신은 쉼 없이 촬영에 촬영을 거듭해 왔으나 코로나19로 꽁꽁 언 극장가 여파로 4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게 된 상황. 주지훈은 “오랜만에 관객분들께 제 영화를 소개해 드릴수 있고, 오랜만에 기자 분들과 얼굴 맞대고 인터뷰할 수 있는 오늘을 즐기고 있다”며 변함없는 여유와 유쾌함으로 환하게 웃었다.
# 오직 블록버스터? 중규모 영화들이 필요해요
먼저 대세 배우의 중규모 영화 선택, 그 배경을 물었다.
“예전으로 하면 40억 원 제작비(‘젠틀맨’의 제작비는 77억 원), 요정도 사이즈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나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턴가 100억 넘는 영화들이 촘촘히 기획되고, 스토리 괜찮다 싶으면 작품 크기를 키우기도 했는데요. 이(젠틀맨) 스토리에 100억 넣으면 비어 보입니다, 손익분기점 넘겨야 하니 규모를 확 키우면 빈틈이 생기는 거죠. 그 스토리에 적합한 규모가 좋다고 생각해요.”
“개인적 취향이지만 영화 좋아하고, 많이 보고, 장르 무비 좋아합니다. 우리 영화를 더 좋아하고, 평론가분들이 좋아하시는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일테면,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 같은 좀 독특하고 의도적으로 B급 감성인 영화 좋아해요, 잘되지는 않았지만. 장르영화 보는 것 좋아하고, 출연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나의 이미지로 가는 것, 앞으로 (배우로서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경계하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있고요.”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보는 건 프로 배우로서 노력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좋아해서 보는 겁니다. 크리스마스다, TV에서 영화 ‘나 홀로 집에’가 나온다, 봐야죠, 보면 여전히 행복하잖아요. 100만 원 선물도 물론 기쁘겠지만, 어 진짜 기쁘겠는데요(웃음),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 홀로 집에’를 보며 따뜻한 차를 마신다, 너무 행복하지 않나요. 좌충우돌 코미디, 또 이런 장르영화의 매력이 있다는 거죠.”
“얘기가 길었는데, 결국 잘 쓰인 글(대본)이 저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동안의 경험치로 보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기준이 같진 않고, 같을 필요도 없겠지만요. 완벽함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추구한 장르에 맞게 어느 수준 이상으로 글이 쓰여 있으면 저는 그 작품을 선택합니다.”
# 잘 쓰인 글-주변의 조언이 선택에 용기를 줍니다
모든 배우가 같을 수 없고, 누구나 출연료 대신 작품의 본질적 가치나 그 분야 생태계에서의 필요성을 최우선으로 삼기는 어렵다. 주지훈은 그 가치 있는 선택을 ‘막연하게’가 아니라 ‘글이 어떻게 쓰여 있는가’라는 구체적 기준을 통해 결정한다고 말했다. 물론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누가 저를 기절 시켜서 도장 찍는 건 아니니(웃음) 자의로 선택하는 거죠. 다만 독단으로 혼자 결정한다기보다는 점점 주변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예전에는 제 선택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더 살았으니까 사람이 나아졌다기보다 그저 경험이 많아지는 거잖아요, 경험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이런저런 커피를 마시며 커피 맛을 알게 되듯, ‘아, 이런 영화가 있네’ 그 맛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경험이 중요한데, 제 경험엔 한계가 있잖아요. 저와 다른 경험을 했고, 하고 있는 주변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들을 수밖에요.”
“그 주변이 누구인가도 점차 변하는데, 그전엔 중역분들에게 물었다면 지금은 회사의 20대 초반, 2030 직원들에게 시나리오에 관한 의견을 물어요. 제가 어릴 땐 아직 경험 못 한 것을 경험한 나이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었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저에게서 2030 감성이 사라져 갈 수 있으니 회사 내부의 젊은 의견을 많이 취합합니다.”
# 판타지지만 리얼하게…힘없는 우리가 이기는 이야기
명쾌하고 솔직하다. 오랫동안 차근차근 생각하며 살아온 결과, 논리적으로 체계가 잡힌 ‘사고 틀’이 보이고 그것을 정확히 표현해내는 ‘언변’을 갖췄다. 솔직함이 그 특성들에 신뢰감을 부여한다.
“(‘젠틀맨’에서 제가 맡은) 지현수,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감독님이 글을 잘 쓰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출연했겠죠.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잘 말해 볼 테니 예쁘게 써 주세요(웃음). 한 장면 안에 복합적으로 현수를 잘 넣어 놓으셨어요. 사실, 사람 감정 복합적이잖아요.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눈이 많이 온 거예요. 눈 와서 기분 좋은데,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좀 센치 해지기도 하고, 출근할 생각을 하니 와! 어느 하나를 보면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기쁨부터 슬픔, 짜증까지 다 섞이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현수도 정의로운 인물 같지만 동시에 영화 포스터에도 나와 있듯 ‘합법 불법 가리지 않는’ 복합적 인물이에요. 그래서 실제의 우리와 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좀 허세도 있는 흥신소 사장이지만, 또 검사 행세할 때는 그렇게도 보이고, 영화 마지막 선택에서는 좀 쿨하게 멋지기도 하고요.”
“관객분들이 영화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 영화에 ‘판타지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힘없는 자들이 모든 걸 다 가진 상대를 이겨나가는 이야기니까요. 이야기는 판타지인데 화면은 ‘리얼 톤’으로 가야 해요, 관객분들이 실제로 느끼시게 하려면요. 말이 안 되지만 ‘판타지이지만 리얼리티로 가자’는 게 영화 ‘젠틀맨’의 큰 기조예요. 현수도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못 하는 게 없는 인물 같지만 동시에 삼촌 같고 옆집 아저씨 같은, 평범한 우리로 보였으면 생각하며 표현했어요. 김화진 검사(최성은 분)가 보기에 그래야 덜 의심하리라 생각했고, 그 시점으로 관객분들도 지현수를 믿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 현수 복근에 왜 ‘왕’자가 없냐면요…하나에 열이 담기는 복합장르
‘한 장면 안에 지현수라는 인물이 복합적으로 표현돼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바로 그 인물을 연기한 주지훈의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주지훈은 물으면 답이 나오는 사람이고, 같은 질문인 듯해도 각도를 돌려 물으면 또 다른 표현으로 현장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 시켜 주는 배우다.
“짧게 나오는 샤워 장면이지만, 흥신소 사장이면서 장차 검사 행세할 거니까 검사처럼 보여야 하고. 이걸 제 몸을 봤을 때, 관객분들이 말로 설명은 안 돼도 직관적으로 느끼실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친구의 몸, 운동 열심히 했지만, ‘왕(王)’ 자가 딱 있지 않거든요. 그 몸에서 현수의 전사(영화에 나오지 않은 이전의 일상이나 이야기)가 느껴졌으면 했어요. 흥신소 사장이니까 일을 잡아 와야 하잖아요, 저녁에 고객 응대를 할 거예요, 삼겹살에 소주도 하고. 영업이라는 게 ‘미인계’도 있을 거예요. 큰 회사는 아니니 인원 부족하면 사장이지만 달리기도 해야 하니 체력 관리도 한 몸이어야 하죠. 도덕적 의뢰만 있는 건 아니니 자기를 지키는 힘도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저 운동 진짜 열심히 했는데 ‘왕’자 복근은 없게 한 거죠, 의도예요. 또 샤워하고 나서 양복 수트에 머리 넘겼는데, 얼굴 반짝반짝까지는 아니죠, 배우나 모델도 아닌데. 그래서 얼굴 분장, 메이크업은 안 했어요. 여러모로 현수가 일상적으로 보였으면 했어요.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대본이 쓰여 있었습니다.”
배우 주지훈은 감독 김경원에 대해 초지일관 존경과 호의만 표했다. 영화 촬영 전에 충분히 얘기 나누고, 성실히 촬영하면서 다져진 신뢰로 느껴졌다.
“콘티를 보니 대본에 있던 ‘모텔 벽 실외기 장면’이 없어졌어요. 배우 안전을 위해 뺐나, ‘저는 괜찮아요’ 말하자니 그게 아니라 여러 종합적 판단에서 영화를 위해 뺐을 수 있으니 섣불리 말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감독이 판단하신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실외기 장면이 좋았어요. 제가 (위험한 촬영을 간과할 만큼) 무모해서가 아니라 모텔 안에서 이야기가 죽 가니 관객 보시기에 답답할 수 있겠다 싶은 찰나 인물이 밖으로 나가면 관객의 시선도 시원하고, 현수가 어디로 도망갔나 여러 설명보다 그냥 딱 보여주면 설명도 쉽잖아요. 이 얘기를 그냥 막 할 수는 없으니까, 감독님께 말씀은 드려봐야지 하고 얘기를 시작한 뒤 핵심을 향해 다가가는 데 2시간이 걸렸어요(웃음). 감독님께서 ‘굳이 위험성 있는 걸 찍어야 할까?’, 제가 ‘나 괜찮다’ ‘원래 대본대로가 좋다’ ‘설명도 잘되니 찍자’, 그래서 영화에 들어가게 됐어요.”
# 모든 장면에는 ‘신의 주인’이 있다
영화 ‘젠틀맨’에는 몇 가지 미덕이 있다. 돈(많은 제작비)으로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라 영화의 기본 문법,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반전 있는 전개로 완성했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적 영화다. 주지훈의 남성미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예쁜 남자’ 전성시대에 정통 미남자의 매력을 만날 수 있다. 신선도 높은 액션 시퀀스가 등장한다. 일명 ‘맨발 추격자’라고 불러도 좋을 조필용(이달 분) 캐릭터도 새롭고 말도 안 되게 잘 달리는 속도, 그러면서 숨 한 번 차지 않는 모습이 쾌감을 선사한다.
영화의 압권이라 할 장면이 조연에게 간 소감은 어떨까. 데일리안 취재에 따르면, 주지훈 등의 응원 속에 삭제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편집실에서 살아났다.
“영화의 중간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장면이죠. ‘젠틀맨’은 명백한 오락영화이고, 모든 장면에서 흥미가 있어야 하고, 쾌감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고 우리보다 센 놈들을 깨나가는’ 게 큰 이야기인 영화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조필용의) 그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맨발 달리기로 자동차를 추격하면서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방긋방긋 뛰어가는 장면, 영화의 3분의 2에 왔을 때 재미를 드리는 장면, 장르적 쾌감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무조건 ‘신(scene, 장면)의 주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신의 주인’을 모두가 살려주지 않으면 안 돼요. 그 장면의 주인은 필용이지요.”
“내가 많이 보이고 칭찬받는 것, (작품의) ‘살림살이’ 나아질 것 같아도 아니에요. ‘정크푸드’ 같은 거예요. 영화가 살아야 배우도 오래 갈 수 있어요. 선택받는 직업이니 선택받을 수 있는 배우로서의 ‘장기적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촬영 전) 대본 볼 때 감독님이 잘 살려 주시길 바랐는데, 딱 그렇게 해주셨어요.”
# ‘젠틀맨’은 명백한 오락영화 “즐겨 주세요~”
점심 먹지 않으면 되니 인터뷰 더 해도 좋다는 열의를 보인 배우 주지훈, 얘기를 듣노라니 배우이면서 제작과 연출의 눈을 겸비하여 작품을 바라보고 현장에 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을 통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면, 기자의 부족함이다. 배우 주지훈을 넘어 ‘영화인 주지훈’으로 부르고 싶은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관객들이 ‘젠틀맨’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람 팁은 무엇일까요.
“명백한 오락영화입니다. 범죄도 섞여 있고 장르가 복합적이에요. 굳이 분석한다기보다 그냥 즐기시길 바랍니다. 감독님께서 어려운 얘기를 문맥(맥락)으로 술술 읽히게 잘 풀어내셨어요. 코로나19로 고생하시고 경기도 어려운데 재미있는 영화 보고, 끝나고 노가리에 맥주 한 잔 하시면 어떨까요. 이야기의 확장성이 좋은 영화예요, 흥행되면 2편이 나올 수도 있고 시리즈가 될 수도 있게 확장성 좋게 쓰셨어요.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관객 여러분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제일 중요하겠고요. 부디, 즐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