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살아온 궤적에서 본 적실성 [민경우의 운동권 이야기]
입력 2022.12.20 04:04
수정 2022.12.20 05:52
‘자민통 그룹’ 사건, 검찰이 사건 과장했다고 보기 어려워
유력 정치인들의 과거 행적이 효과적으로 은폐되고 있어
허구의 성 위에 검찰독재, 검찰공화국과 같은 판타지 탄생
김경수, 한명숙, 조국 관통하는 민주진영 위험한 DNA인 듯
연말 유력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논의되고 있다. 대상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다. 김경수 전 지사가 자신에 대한 사면에 반대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김경수 전 지사는 ‘가석방 불원서’에서 “처음부터 줄곧 무죄를 주장해온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 판결이 유죄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애초부터 죄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면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고 있다. 필자는 김경수의 살아온 궤적을 통해 그의 말이 적실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지적할 것은 그의 학생운동 경력이다. 2014년 본인이 쓴 책 ‘사람이 있었네’에는 학생운동 과정에서 3번 투옥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988년 1차 구속(서울대 86학번이기 때문에 3학년 때)되었고 89년 2차 구속되었는데 이 때는 구속 사유가 총학생회 학술부장으로 북한 바로알기 자료집을 만들었다는 이유다. 김경수는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만 해도 구속되던 ’야만의 시대‘였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학생운동에서 주사파가 태동한 것은 1986~87년 무렵이지만 87년까지만 해도 주사파 관련 서적이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다. 학생 일부가 단파 라디오를 듣고 타자를 쳐 책자로 만들어 전파하는 식이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학원에 자유로운 정치공간이 형성되자 북한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대학신문 등에서 주체사상, 김일성 관련 내용들을 공공연하게 게재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89년 북한 바로알기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학술 사업이 아니라 주사파 운동권 집단이 총학생회를 빌어 자신의 정견을 전파하는 일종의 대중정치사업이었다.
이어 1991년 “경찰에서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을 ‘반국가단체’로 조작, 둔갑”시켰고 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유명한 ‘자민통 그룹’ 사건이다. 주사파 조직들은 대부분 조직의 명칭이 있으나 자민통 그룹은 무정형의 조직을 지향했다. 자민통 그룹도 조직의 명칭이 아니라 조직에서 낸 기관지의 이름을 공안기관에서 조직의 이름의 차용한 것이다.
자민통 그룹은 90년경 학생운동에서 규모가 큰 주사파 지하조직이었다. 나는 주사파 연구를 위해 관련 증언들을 모은 바 있다. 여기에는 김경수 관련 증언도 있는데 김경수 관련 증언들은 지면을 통해 밝힐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의 주장처럼 검찰이 무리한 기소로 사건을 과장했다고 보기 어렵다.
김경수의 학생운동 관련 증언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정직한 회고이다. 80년대 학생운동 관련자들의 증언, 예를 들어 안희정, 이인영 등 관련자들의 증언에서 그들 모두는 그들이 순수한 학생운동을 했고 이념적인 성향은 중요하지 않거나 부풀려졌다고 주장한다. 안희정이 고려대를 기반으로 한 주사파 조직 반미청년회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고 이인영이 전대협 1기 의장이어서 운동경력을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결국 본인의 거듭되는 부인, 그에 더해 주변 사람들의 오랜 기간의 묵인이 더해지면서 유력 정치인들의 과거 행적이 효과적으로 은폐되었다.
김경수의 가장 뚜렷한 경력은 노무현-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이다. 그의 정치적 경력 중 가장 극적인 경험은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추론이 있다. 관련 증언들은 잊혔거나 이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시작과 끝만을 요약한다면 첫째, 무슨 일이 있었고 둘째, 그것 때문에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은 대통령에게 불리한 무슨 일이 있었고 검찰이 이를 추궁하자 대통령이 죽음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에게 불리한 무슨 일인가가 있었고 대통령이 보기에는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을 넘어 민주진영 전체의 악재로 확대될 것이라고 봤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인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이 했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그가 저지른 허물은 허물대로 정직하게 대면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2009년 5월 서울 시청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에 시간을 내 참가했다. 서민적이고 소탈했던 대통령을 추모하는 것과 그가 했던 공과를 정직하게 평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그렇게 인간 노무현을 떠나보냈다. 반면 사람들은 노무현 죽음을 계기로 상황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없음에도 검찰이 사건을 조작하여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답변은 근본적인 의문에 봉착한다. 그럼 아무 문제가 없는 대통령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가하는 점이다. 이 초보적인 질문을 무시한 채 사람들은 허구의 성을 쌓기 시작했다. 허구의 성 위에 검찰독재, 검찰공화국과 같은 판타지가 태어났다.
80년대 학생운동은 주체사상, 레닌주의와 같은 급진이념으로 얼룩졌다. 본인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20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 역사 중에서 민주화운동만 남기고 그들이 급진이념에 물들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은폐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김경수다.
2009년 5월 대통령이 사망한 상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 사망에서 대통령이 책임져야할 어떤 사실을 집단적으로 부정했다. 여기에는 민주진영 뿐만 아니라 중도보수 진영의 상당 부분도 그러했다. 그렇게 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사망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보다 정직했어야 한다. 그 중심 어딘가에 김경수가 있었다.
2019년 조국 사태에서 비롯된 정치적 각축의 뿌리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조국은 자신과 가족이 저지른 잘못을 진영 대결로 대치했다. 나는 진보와 보수 이전에 조국과 그 가족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고자 했다. 나는 조국과 그 지지자들이 사실에 정직하지 못한 것을 두고 진보와 민주진영을 떠났다.
이어 한명숙과 김경수 사태가 있었다. 총리를 지낸 한명숙은 그가 받은 1억원 짜리 수표가 명료히 확인되었음에도 한사코 사실 자체를 부인했고 김경수 또한 그러했다. 사실을 진영 대결로 치환하고 사실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태도는 김경수, 한명숙, 조국을 관통하는 이른바 민주진영의 위험한 DNA인 듯하다.
글/민경우 시민단체 대안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