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지원 놓고 고심
입력 2022.11.03 09:59
수정 2022.11.03 10:01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상황 보면서 다른 기업들과 방법 찾을 것"
'여론 대응 차원 국민성금 모금' 경찰 문건 논란으로 취지 퇴색 우려
성금 취지에 맞게 사용할 주체 마땅치 않아…"좀 더 상황 지켜봐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발생한 핼러윈 압사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주요 대기업들이 희생자 및 유족 지원에 나설지 관심이다. 재계는 화재나 수해와 같은 재난상황은 물론,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십시일반으로 피해자 지원에 나선 바 있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지원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결정한 곳은 없지만 조만간 4대그룹을 중심으로 성금 기부 등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지난 1일 서울광장 합동분향소를 찾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희생자 지원 계획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상황을 보면서 사회적으로 다른 기업들과 같이 생각해보고 방법을 찾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구체적인 방식이나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원에 나서겠다는 의지는 표명한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근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한 달여 뒤면 연말 이웃사랑 성금으로 상당한 금액의 기부가 예정돼 있어 다소 부담스런 상황”이라면서도 “사망자가 156명에 이르는 대참사로 전 국민의 애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지원 방식은 기업 규모별 기부를 통해 희생자 유족들을 위로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8월 수해복구 성금으로 삼성그룹이 30억원, SK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LG그룹, 포스코그룹이 각각 20억원씩 쾌척했고, 그 외 재계 서열 10위권 내외 기업들이 5~10억원씩 지원한 바 있다.
통상 재계 서열 1위인 삼성그룹이 기부 계획을 발표하면 다른 기업들이 기업 규모별로 기부액을 정하는 방식을 택해 왔다. 삼성의 기부액이 일종의 기준점이 되는 셈이다.
지난 3월 울진 강릉 삼척 등 동해안 지역 산불 당시 현대차그룹이 이례적으로 가장 많은 50억원(삼성그룹 30억원, SK그룹, LG그룹, 포스코그룹 각각 20억원)을 기부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부금 액수는 재계 서열에 비례했다.
이번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지원 역시 다른 기업들이 삼성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모양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거액의 기부금은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아직 결정된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그룹 등 주요 대기업들은 지난 2017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얽혀 비난을 받은 이후 기부금 운영 투명성 강화 차원에서 10억원이 넘는 기부금, 출연금 등을 낼 때 반드시 이사회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의 기부가 이뤄지는 시점이 다소 늦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공개된 경찰청의 이태원 참사 동향 분석 문건에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 확산을 막기 위해 국민 성금을 모으는 방안을 검토’하는 내용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성금 기부가 이어질 경우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겠다는 취지가 퇴색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유족단체 등 지원금을 취지에 맞게 사용할 주체가 없다는 점도 기업들의 지원 결정을 늦추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기부금이 됐건 다른 방식의 지원이 됐건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쪽으로 사용돼야 하는데, 그 부분을 협의할 주체가 없는 상황”이라며 “개별적으로 지원을 하게 될지, 단일 기부단체로 창구를 통일하게 될지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국민성금 모금의 일환으로 기업들의 성금 기탁 창구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통일된 바 있다. 당시 기부금은 삼성그룹 150억원, 현대차그룹 100억원, SK그룹 80억원, LG그룹 70억원 등 단일 목적 기부액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업 기부금과 일반 국민 기부금을 포함해 총 1141억원의 성금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및 생존자 가족, 구조활동 중 사망한 민간잠수사 등에게 지급하고 나머지 435억원은 안전한 대한민국 만들기 사업에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