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인권이 피해자 위에 있는 나라" [김하나의 기자수첩]
입력 2022.09.30 07:01
수정 2022.09.30 04:51
'피해 호소인'과 '진정한 피해자'로 가르는 사회…피해자 '고통값' 저평가
상습 스토킹에도 불구속 재판…피해자 '합의' 받아내면 형량 감경 기회
심신미약 변론 전략·반성문 물량공세로 선처 요청…모든 방어권 행사
가장 효과적인 피해자 보호는 가해자 제재…피해자 고통 헐값 취급 안 돼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집단을 분류해 위계를 만들어 낸다. 세월호 정국 속 우리 사회는 참사 피해자를 단원고 유가족과 일반인 유가족으로 나눴다. 성범죄 사건 속 우리 사회는 피해자를 또다시 '피해호소인'과 '진정한 피해자'로 갈랐다. 피해자는 목숨을 위협받기 직전까지 저항하고,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명백한 폭행·협박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이야기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실제 고통 값에 비해 한 없이 저평가됐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의 피해자는 2019년부터 전주환(31)으로부터 350여 차례에 걸쳐 '만나 달라'는 등의 일방적 연락을 받고 불법 촬영물을 빌미로 협박까지 받던 중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경찰이 조사한 피해자의 스토킹 범죄 위험도는 '위험성이 없음 또는 낮음' 단계였다. 안익득 사건에서 안씨는 아파트 주민 5명을 살해하고 방화하기 전 여고생을 반년 가까이 스토킹을 했는데도 피해자가 상해 피해가 없었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했다.
반면 우리 사법제도는 범죄 피의자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의 피해자는 오랜 기간 고통을 받다 전주환을 두 차례 고소했지만 전주환은 끝내 구속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첫 고소 당시 경찰은 불법 촬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올해에도 전주환은 상습 스토킹을 저질렀지만 경찰은 구속 영장을 청구하지 않았다. 경찰도 법원도 전주환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 받을 권리를 허락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와의 '합의'를 받아내면 형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현행 양형기준은 범죄 죄질이 나빠도 피해자와의 합의를 중요하게 참작하기 때문이다. 스토킹 가해자는 '합의해달라'며 피해자를 찾아와 종용하고, 피해자는 주변마저 피해를 볼까봐 극도의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전주환은 불법 촬영, 스토킹한 혐의로 기소돼 직위해제 된 상태에서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1심 선고를 앞두고 범행을 저질렀다. 전주환은 "징역 9년이라는 중형을 받게 된 건 다 피해자 탓이라는 원망에 사무쳐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를 살해하고도 심신미약 변론 전략으로 감형을 시도하거나 반성문 물량공세로 재판부에 선처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가해자는 또다시 자신의 모든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인권 변호사 시절 살인을 저지른 조카의 변론을 맡으면서 "김씨가 심신미약 상태였다"며 감형을 주장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대표가 변호를 맡은 후 조카 김씨는 반성문을 28차례나 제출했다. 그전에는 2006년 6월, 7월 1차례씩 반성문을 제출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이 단계까지 거치면 피해자의 고통은 헐값이 돼 버리고 만다.
고통에 크나큰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 고통의 양은 다시 측정돼야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데 안 받아줬다"는 더불어민주당 이상훈 서울시의원과 같은 인식이 고통의 무게를 정확하게 재는 걸 어렵게 만든다. 스토킹 범죄에서 피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무죄추정의 원칙은 피해자 보호를 어렵게 한다. 피의자가 모든 방어권을 행사하는 사이 스토킹 피해자는 목숨을 잃어버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구속심사 기준에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미래의 피해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피해자 보호는 가해자 제재다.
"가해자 인권이 피해자 위에 있는 나라" 자조 섞인 한탄이 사회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범죄 피의자의 기본권 침해를 막는 사이 피해자의 인권이 외면 받는 현실을 수도 없이 많이 목도해왔다. 사회적 한탄은 '범죄자는 죄를 짓고 나와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구나'라는 깨달음에서 온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은 안산으로 돌아와 막대한 국민 세금으로 관리를 받고 있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살고 있던 안산을 떠나 주거지를 옮겨야만 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헐값 취급하는 한 이러한 한탄은 계속 될 것이다.